과거 개발독재 시대 우리의 경제발전 모델은 한정된 자원을 몇몇의 특정기업에 몰아져 수출 시장에서의 성과를 단기에 높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배 주주 가족 이익 중심의 경영이 굳어져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상당기간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으로 도약한 지금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이 유행할 정도로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건전성이 개선되는 추세다. 오히려 과도한 지배구조 규제가 기업 경영의 안정성과 과감한 투자를 위축시킬 위험요인으로 지목될 정도다. 경제계가 16일 정치권을 향해 기업 지배구조 규제 강화 법안의 발의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한 이유일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8개 경제단체는 공동성명을 통해 “기업을 옥죄는 지배구조 규제 강화 법안이 무더기로 발의되고 있다”며 “국회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무분별한 규제 입법을 당장 멈춰 주시길 간절히 요청한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에는 상법 개정안, 상장회사 지배구조법 제정안 등 기업 지배구조 관련 법안 19건이 계류 중이다. 이들 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규제를 신설·강화하는 것이 골자다. 경제단체들은 이들 법안에 대해 “기업경영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는 등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비판했다.
무더기 규제 입법이 기업에 미칠 리스크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익단체의 이기주의로 치부하기 어렵다. 특히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이사에 대한 배임죄 고발 및 손해배상책임 소송 등이 남발돼 기업의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신산업 진출과 대규모 설비투자 등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국 경제를 지탱해 온 반도체의 경우 1983년 삼성의 진출 선언 이후 1987년까지 1400억원의 누적 적자가 발생했는데, 주주들이 이를 문제 삼아 소송을 남발했다면 현재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는 경제계의 항변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소수주주들이 특정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최대주주 의결권 3% 제한 등도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규제들이다.
한국 경제는 AI반도체, 바이오, 우주항공 등 미래 먹거리에 대한 기업의 과감하고 도전적인 투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이런 때 기업들의 의사결정을 더디게 하고 경영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지배구조를 흔들면 결국 국민 경제가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지배구조 선진화는 가야할 길이지만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