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 필수장비 생산업체인 ASML발 실적 충격이 상당하다. ASML이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내년 매출 예상치로 시장 전망치인 361억유로에 크게 못 미치는 300억 유로로 낮춰 잡았다. 3분기 신규 수주도 당초 예상치인 56억유로의 절반에 못 미치는 26억유로에 그쳤다. 장비 업체 실적은 반도체 경기 예측 바로미터로 내년 반도체 경기가 심상치 않다는 의미다.
ASML의 3분기 실적은 매출 74억6700만유로(약 11조870억원), 순이익 20억7700만유로(약 3조841억원)로 각각 전년 동기 대비 11.9%, 11.1% 올라 나쁘진 않다. 문제는 내년 매출 예상치와 3분기 장비 주문량이다. 보통 1년 전에 장비 주문이 이뤄지는데, 예약 건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반도체 업계가 투자를 크게 줄였다는 뜻이다. 실제 파운드리 적자에 시달리는 인텔은 유럽 공장 계획을 백지화하거나 축소하고 있고 삼성전자도 당초 올해 하반기 완공하려던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을 2026년으로 미뤘다. AI반도체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범용 D램·낸드플래시 수요가 둔화한 탓이다. 가격도 정체 내지 떨어질 것으로 보여 우리 반도체 기업들의 시름이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짧은 반도체 봄이 지나자 추운 겨울이 바짝 다가온 셈이다. 우리로선 더 혹독할 수 있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쫓기고 미국이 AI 반도체 수출 제한을 강화하려는 등 악재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중국의 D램 공세는 위협적이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산 D램이 내년에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1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D램 시장을 내주기 시작하면 최첨단 반도체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실제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는 최근 2세대 고대역폭 메모리를 생산해 공급하고 있다. 우리와 기술 격차가 있지만 중국 수요를 충당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고성능 메모리에서도 빠르게 따라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기술 격차를 벌이는 것 뿐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최근 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CXL)와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등 고성능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기업 홀로 겹겹의 난관을 뚫고 나가는 건 쉽지 않다. 정부가 8조8000억원을 지원한다지만 세금지원일 뿐이다. 산업용수 공급 인프라 건설 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식으로 생색만 내선 안된다. 통큰 지원과 규제 완화, 인력 양성에 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제한을 풀 외교적 노력도 필요하다. 기업이 기술개발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국회도 말만 앞세우지 말고 입법으로 뒷받침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