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수출기업들이 미중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불안 등 지정학적 리스크를 심각한 경영 위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수출 기업 3곳 중 2곳이 경영 위협이 된다고 응답했고, 그 중 23.7%는 경쟁력 저하를, 3.1%는 기업 존속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했다. 지정학적 불안이 갈수록 커지고 더해지는 상황에서 한발 앞선 위험 관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기업들의 피해 유형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환율 변동·결제 지연 등 금융 리스크’(43.1%)가 가장 많았고 ‘물류 차질 및 물류비 증가’(37.3%), ‘해외시장 접근제한·매출 감소’(32.9%), ‘에너지·원자재 조달 비용 증가’(30.5%) 등 직접적 피해가 크다. ‘현지 사업 중단 및 투자 감소’(8.1%) 같은 막다른 처지에 몰린 경우도 적지 않다. 교역 나라별로 피해도 달라 중국 교역 기업은 ‘해외시장 접근 제한 및 매출 감소’가 30.0%로 가장 많았고 미국, 러시아 대상 수출입 기업들은 ‘환율 변동·결제 지연 등 금융 리스크’ 피해가 컸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거래 기업들은 수출 대금 결제 지연, 외화 송금 중단을, EU와 중동 교역기업들은 ‘물류 차질 및 물류비 증가’ 피해가 막대하다. 기업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장애물이 지구촌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기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전은 북한의 무기공급과 인력지원 등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역시 레바논, 이란 등으로 전선이 넓어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미 대선에서 누가 되든 더 격화할 가능성이 크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갯속으로 세계가 휩쓸리고 있다. 우리로선 북한 도발이 잇따르면서 안보 리스크도 무시하기 어렵다. 기업 상당수(40.2%)가 앞으로도 지정학적 위험이 지금과 다름 없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우리는 수출 기업들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 지정학적 리스크에 더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수출 길이 막히고 비용이 증가하면 개별 기업들의 경영 악화는 물론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칠 수 밖에 없다. 공급망 불안정, 원자재 가격 급등, 물류 시스템 마비와 같은 리스크를 상수로 둔 철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 금융 리스크 관리와 수출 바우처 지원 뿐 아니라 대체 시장 개척, 공급망 다변화, 핵심 원자재의 안정적 조달 등 민관 합동의 정교한 수출전략이 필요하다. 혹독한 외부 환경에 기업들이 흔들리지 않게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