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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다영의 읽다가]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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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소미미디어 북트레일러)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문다영 기자] 내가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다.

사랑 하나면 세상에 못 이룰 게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호기롭고 당차고 자신감 넘쳤던 그때 만난 사람은 어디 하나 나사가 빠진 듯한 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할 말은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장막이 쳐 있는 느낌. 누군가 한발 더 다가서면 세 발은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알고 지내던 그와 관계가 연인으로 진전했고 나보다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자만에 빠졌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공허했다. 마치 더 이상의 가까움은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람 같았다. 결국 알아낸 그 사람의 비밀은 상처였다. 어릴 적 큰 수술을 감행해야 했던 그는 갑작스러운 병을 알기 전까지 가족에게까지 ‘꾀병’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근 6개월간 혼자서 알 수 없는 고통과 싸우던 그는 학교에서 쓰러졌고 폐에 생긴 문제로 인해 큰 수술을 받았다. 이후 그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가족마저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실망에서 파생된 비뚤어진 마음이 누가 됐든 사람을 전부 믿지는 못하는 그를 만들어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치유는커녕 그 상처를 메꾸지도 못했다. 내가 해주는 사랑으로 그 사람을 바꾸기란 무리였다. 깊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내 사랑은 그 사람을 바꿀 만한 계기를 주지 못했다. “당신이 조금 더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했으면 좋겠어”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라는 나의 말들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타이밍상의 문제였을 수 있지만 그 이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도 그는 별달리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몇 년만에 만난 그는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마음에서 사람을 밀어내는 습성은 여전했다. 아내 역시 그런 말을 한다며 씁쓸하게 웃기도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로든, 사랑으로든 여러 사람을 만났고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만드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만 결국 나는 그 사람들이 바뀌도록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걸 보면서 느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다. 결국 사람의 고집은 외부의 영향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스스로가 절실히 느끼고, 깨닫지 않는 이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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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틸컷)


그런 생각으로 살다 과거의 내가 가졌던 환상과 마주했다. 어린 소녀는 한 소년을 바꿨다. 사랑으로 규정하기엔 숭고하기까지 한 변화를, 한 소년은 소녀를 통해 겪는다. 떠난 그녀에게도, 남은 그에게도 축복일 수 있는 만남. 혹자는 이 책을 연애소설이라고도 하고 가장 순수한 청춘을 통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라고도 부른다. 모두 맞는 말이다. 나라면 이 책을 한 인간의 성장의 책이라 부르고 싶다. 굳이 규정하자면 나비의 변태(變態)에 가까울 정도다.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고 동해를 건너와 한반도까지 잠식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다. 두 청춘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라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남학생 1인칭 시점에서 쓰인 이 책은 죽음을 앞둔 한 여학생이 아닌 남학생이 주인공이다. 죽음이 갈라놓을 사랑에 대한 애달픔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학생의 변모를 조명한다.

‘따분한’ ‘지겨운’ ‘눈에 잘 띄지 않는’ 등 수식어로 불리며 단순한 클래스메이트로 분류되는 이 남학생은 우연히 같은 반 사쿠라의 비밀을 알게 된다. 이 화제의 소설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학생의 이름이야 금세 알아낼 수 있겠지만 남학생의 이름은 작가가 던진 소설적 재미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여기선 밝히지 않도록 하겠다. 사쿠라는 췌장암으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목석같고 당최 사람 사귀는 것이라고는 관심조차 없는 남학생은 사쿠라로 인해 조금씩 변해간다. 사쿠라에게 남은 시간은 1년. 하지만 짧디 짧은 1년조차 예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오직 사랑에 목매이지 않는 작품이다. 사랑이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힘, 사랑이라 규정하지 않아도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만들어내는 변화에 주목한다. 라이트노벨 분야 신인상을 노리며 글을 써오던 작가가 썼다기에는 그 깊이가 너무나도 다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분명 도입부부터 마지막까지 일본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어조나 진행도 가볍다. 자칫 이런 식의 문체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인터넷 소설로 국내 많은 독자들을 울렸던 귀여니의 초반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귀여니가 끝없는 이모티콘의 짜증 속에서도 결국 독자의 공감을 얻어내고 그들을 울렸듯 스미노 요루 역시 허술한 듯한 문체와 구성으로도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여학생과 남학생의 이야기가 어떻게 귀결될 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독자를 끌어가던 작가는 말미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먹먹할 정도의 울림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저 그런 연애소설인 줄 알았지?’라고 호기롭게 ‘메롱’을 날리는 느낌이다.

책은 크지 않고 두께도 얇다. 출퇴근길 들고 다니며 읽기에 좋다. 문장이나 내용도 딱히 어려운 지점이 없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다. 다만 책은 70% 지점을 지나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작품의 감동과 그 깊이를 깊게 느끼고 싶다면 휴일, 넉넉한 시간을 잡고 한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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