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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야 축구가 좋아? 내가 좋아?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내 남자 길들이기>

원래는 핀란드 영화

<내 남자 길들이기>. 얼핏 제목만 들어서는 멜로 영화의 한 종류 같네요. 하지만 원제를 보니 축구팬이라면 쉽게 영화 내용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원제는 FC Venus입니다. ‘FC’는 축구팀(Football club)을 의미하는 약자이고, ‘venus’는 주로 여성성을 의미하죠. 즉 여자 축구팀에 대한 이야기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남자 길들이기라니? 외국 영화의 우리말 제목들 중에는 영화의 원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하는 것들이 많더군요. ‘FC’라는 말은 이제 조기 축구회에서도 자주 쓰는 축구팀 명칭인데 굳이 ‘내 남자 길들이기’라는 이름을 써야 했는지. 어찌 생각해 보면 스포츠보다 멜로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우리네 문화의 산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원래 이 영화는 핀란드에서 제작되었다가 2006년에 독일에서 리메이크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독일 리메이크판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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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개봉작 내남자 길들이기의 포스터.

남자들의 축구 중독에 질려버린 여자들, 축구를 시작하다

영화는 독일의 시골 마을에서 아마추어 축구팀(우리로 치면 조기 축구팀) 활동을 하는 어느 남자들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이 축구팀의 이름은 ‘엠마1995’입니다(축구팀의 창단 연도를 팀 이름에 넣는 것은 독일 축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1860뮌헨이나 하노버96, 샬케04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지요).

어느 날, 평소처럼 열심히 축구를 하던 엠마1995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팀의 주전 한 명이 뇌진탕으로 의식불명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 엠마1995의 뛰어난 스트라이커였지만 직장 문제로 베를린으로 떠나버린 폴(Paul)에게 연락을 합니다. 다시 팀에 합류해 달라고요.

폴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약혼자 안나(Anna)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누구보다도 끔찍이 축구를 싫어합니다. 고민 끝에 폴은 친구들을 돕기 위해 안나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아니 사실은 축구 이야기는 하지 않고,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안나를 속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남자 하나만 믿고 낯선 타지에 온 안나. 하지만 그녀는 엠마1995를 보고 기겁을 합니다. 축구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월드컵 결승전을 보러 신혼여행을 떠나는 폴의 친구들. 주례를 서는 신부님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소재로 주례사를 진행할 정도입니다.

반면 엠마1995 팀원들의 아내와 여자 친구들은 남자들의 축구 중독 때문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축구에만 빠져 가정과 사랑을 소홀히 하는 남자들을 보며 안나는 예전의 악몽이 떠오릅니다.

사실 축구를 지독히도 싫어하는 안나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축구 명감독이었지요. 그런 아버지를 따라 여자 축구에도 한때 몸담았던 안나. 그러나 축구에 빠져 가정을 파탄 낸 아버지로 인해 안나는 축구 혐오증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 친구인 폴이 축구를 하는 것은 물론, 축구 경기와 축구 관련 정보를 접하는 것조차 막았던 것입니다.

결국 안나는 사랑이냐 축구냐를 놓고 폴과 다툽니다. 그리고 엠마1995 멤버들의 아내와 여자 친구들을 모아 ‘FC Venus’라는 팀을 만들어 남자들과의 축구 시합을 제의합니다.

남자들이 이기면 여자들은 더 이상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되, 여자들이 이기면 남자들은 축구를 영원히 끊기로요. ‘FIFA’를 ‘에프 아이 에프 에이’로 발음하는 주부들을 모아서 남자들과 축구 시합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승부일 것 같았죠. 그러나 안나는 여자 프로 축구선수와 심지어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아버지까지 코치로 동원하며 여자들의 축구 실력을 끌어올립니다.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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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남자 길들이기중 한 장면

축구 피라미드의 가장 기초에 위치한 아마추어 축구의 중요성

사실 이 영화는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기 때문에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사회적 메시지나 교훈을 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 것 같습니다. 물론 페미니즘적인 요소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크게 부각되지 않고 오히려 유쾌하게 두 집단의 화합을 보여줄 뿐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유럽 축구의 뿌리를 이루는 아마추어 축구의 모습을 더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흔히 영국에서 유래된 근대적인 축구 시스템의 형태는 피라미드에 비유되곤 합니다. 정점에는 국가대표팀과 클럽팀(프로팀)이 있습니다. 그리고 클럽팀들은 ‘디비전 시스템(Division system)’이라 불리는 차등리그로 구분됩니다. 가장 실력이 있는 몇 팀씩 묶어 차례로 ‘1부 리그’, ‘2부 리그’… 이런 식으로 차등 리그를 만들죠. 그리고 위아래 리그가 매 시즌이 끝날 때마다 최하위와 최상위 팀들을 교환합니다. 이것이 바로 승강제죠.

영국 같은 경우는 지역에 따라서 최대 20부 리그까지도 구성되어 있다고 하네요. 이 중 보통 상위 2~4개의 리그는 프로팀으로 구분되고, 그 외의 하부 리그들은 아마추어 리그로 구분되곤 합니다. 프로리그의 선수들은 다른 직업 없이 축구선수로서만 활동할 수 있지만 아마추어리그의 선수들은 연봉이나 규정상의 문제로 인해 대부분 다른 직업을 병행하는 게 보통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동네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조기 축구팀부터 최상위의 K리그 팀들까지 디비전 시스템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하부 리그의 팀들의 수가 상위 리그의 팀들보다 그 수가 많기에 이런 생태계는 ‘피라미드’로 불리곤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에 나오는 엠마1995 같은 팀은 독일의 하부 리그를 구성하는 많은 아마추어 팀들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온갖 진통 끝에 이제야 승강제가 시작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조기 축구팀들이 프로에까지 진출한 예가 없습니다. 이미 승강제와 디비전 시스템이 확립된 유럽에서는 이런 유의 아마추어 팀들이 최상위 프로리그까지 진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8부 리그에서 시작해 분데스리가에 진입한 독일의 호펜하임 같은 팀이 그렇고, 크게 봐서 100년 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그 지역 철도 노동자들의 아마추어 팀이었으니까요.

풀뿌리 축구와 엘리트 축구가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움직인다는 축구의 디비전 시스템. 그 기초는 이 영화의 엠마1995 같은 아마추어 팀들이 지탱하고 있습니다. 친구들 간의 친목 도모가 목적임에도 그럴 듯한 엠블럼이 박힌 유니폼을 맞춰 입고, 잔디 구장에서 다른 팀과 리그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왜 독일 축구가 그리고 유럽 축구가 세계를 호령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조기축구 역시 전국 어디에서나 팀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기축구팀들이 그저 동네 리그만 형성하고 있을 뿐 유럽처럼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최상위 프로리그로 진출하는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게 우리 아마추어 축구의 치명적인 약점이지요. 이제 우리 리그도 승강제가 시작되었으니 앞으로 아마추어와의 생태계 구성이 더욱 진행되길 바랍니다.

덧붙여: 독일의 아마추어 축구와 프로와의 연관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강팀 TSG 1899 호펜하임(Hoffenfeim, 이하 호펜하임)입니다. 엠마1995와 마찬가지로 창단 연도를 팀 이름에 집어넣은 이 팀은 10년 전만 해도 엠마1995와 마찬가지로 거의 최하위인 8부 리그를 전전하던 아마추어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호펜하임 유소년 축구팀 출신의 IT 갑부, 디트마르 호프 회장의 대대적인 투자로 10년 만에 8부 리그에서 분데스리가로 승격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인구 3,500명에 불과한 진스하임(Sinsheim)을 연고하는 팀이지만 이런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2만 석 급의 경기장을 새로 짓는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지요. 비록 대대적인 자본 투자 덕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유소년 팀 출신의 기업인이 자기 고향 축구팀을 명문으로 만드는 장면은 축구팬으로서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게 진정한 ‘축구팬의 사회 환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네요.

또 다른 예는 여러분들도 잘 아는 독일의 스트라이커 클로제(Miroslav Klose)입니다. 헤딩머신으로도 알려져 있는 독일 국가대표의 뛰어난 공격수이지요. 원래 폴란드 태생인 그는 독일 7부, 5부 리그 등 하부 리그를 전전하다가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감독에 의해 카이저슬라우테른(FC Kaiserslautern)으로 이적해 마침내 월드컵 대표선수에까지 이릅니다.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인력과 팀이 왔다 갔다 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호펜하임과 클로제의 예를 보면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승승장구하는 독일 축구의 저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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