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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범한 아빠, 훌리건 아빠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더 펌>
1988년 영화의 리메이크작
펌(firm). 영어로 ‘회사’를 뜻하는 이 단어는 훌리건 영화에서는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펌’은 원래 서포터 집단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축구장 폭력이 심해지면서 ‘훌리건 조직’을 의미하는 은어로 통용되고 있죠. <더 펌>이라는 영화의 제목만 봐도 이것이 훌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1988년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주연했던 원작이 있습니다. 원작에서도 게리 올드만은 특유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죠.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선 쉽게 구하기가 힘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2009년의 리메이크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1998년 원작의 사진들과 2009년 리메이크판은 훌리건들의 옷차림이 많이 다릅니다. 1988년판에서는 우리가 흔히 ‘훌리건’하면 떠올릴 수 있는 우중충한 색깔의 점퍼와 청바지 차림의 훌리건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리메이크작에서는 심하게 유치찬란한 형형색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훌리건들이 등장하네요. 하지만 이는 리메이크작이 고증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캐주얼 문화가 리메이크작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지요.

1970년대 말, 리버풀 지역의 훌리건들이 아디다스 옷을 입으며 불을 지핀 캐주얼 문화는 <어웨이데이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캐주얼 문화는 이제 런던에까지 상륙하게 되죠. 런던을 연고로 하는 웨스트햄 훌리건들이 엘레세(Ellesse)의 화려한 운동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게 지금 기준에서는 유치하고 촌스러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불량배들 사이에서는 최신의 유행이었던 거죠.

이렇게 당시 훌리건들의 문화를 현실적으로 재연하며 리메이크 된 이 영화, 한 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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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으로 바라 본 훌리건스 더비(Hooligans’ Derby)

훌리건의 종주국이란 오명이 쓰인 잉글랜드. 그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잔인하고 또 치열한 라이벌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밀월의 훌리건들. 경기 때마다 양 팀 훌리건들의 폭력사태가 발생해서 경찰력으로도 진압이 안 되고, 결국 선수들까지 나서 훌리건들을 말려야 간신히 진정된다는 두 팀의 시합을 훌리건스 더비(Hooligans’ derby)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라이벌 의식은 다른 영화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훌리건스>에서도 훌리건스 더비를 다뤘고, <풋볼 팩토리>도 밀월과 함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극성 훌리건을 보유한 첼시 간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러고 보면 밀월이라는 팀은 정말 무시무시한 훌리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나 보네요.

이제 <더 펌>에 대해 살펴봅시다. 영화는 웨스트햄 훌리건의 한 펌(firm)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주인공은 도미닉(Dominic)이라는 소년이죠. 기껏 중고등학생밖에 안 되었을 나이의 도미닉은 친구인 테리(Terry)와 함께 동네에서 장난이나 치고 다니는 별 볼 일 없는 소년입니다. 어느 날 도미닉과 테리는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벡스(Becks)라는 30대 중반 정도의 남성과 시비가 붙습니다.

싸움에는 자신만만했던 도미닉과 테리였지만 벡스에게는 상대가 안 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벡스는 웨스트햄 훌리건 조직의 리더죠. 백전노장 훌리건에게 제대로 찍힌 도미닉과 테리. 하지만 도미닉은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일탈을 저지르는 벡스에게 묘하게 동경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꼬마 취급 하는 아버지에게 싫증을 느낀 도미닉은 벡스를 쫓아 훌리건 조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며 폭력과 유흥에 물들어갑니다.

한편 벡스에게는 라이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웨스트햄과 철전지 원수인 밀월 훌리건의 두목 예티(Yeti)입니다. 어느 날 벡스는 단신으로 밀월 훌리건의 본거지를 찾아가 예티에게 협상을 제안합니다. 다가오는 유럽컵 축구에서 독일 훌리건들에 대항하기 위해 웨스트햄과 밀월 훌리건들이 손을 잡자는 제안이지요. 의외로 예티는 쉽게 이를 승낙합니다. 대의를 위한 단결을 이끌었다며 기세등등한 벡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티의 함정이었죠.

시간이 흘러 독일 훌리건에 대항하여 뭉치기로 한 날, 벡스는 웨스트햄 훌리건들을 이끌고 밀월 동지(?)들을 만나러 갑니다. 하지만 밀월 훌리건들은 망치와 야구 방망이, 칼 등의 흉기를 들고 매복해 있다가 웨스트햄 훌리건들을 기습 공격하죠. 예티의 갑작스런 배신에 혼비백산한 웨스트햄 훌리건들은 처참하게 당합니다.

배신에 분노한 벡스는 복수를 준비합니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도미닉은 벡스의 어긋난 복수심에 반기를 들지만 아버지처럼 도미닉을 보살펴주던 벡스는 돌변하여 도미닉을 마구 폭행하죠.

결국 어쩔 수 없이 벡스의 복수극에 동참하게 된 도미닉. 웨스트햄 팬들은 지하철역에 모여 있던 밀월 팬들을 기습하고, 벡스는 예티를 마구 폭행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예티의 모습에 만족한 벡스. 하지만 벡스가 방심한 사이 예티는 숨겨둔 칼로 벡스를 찌르고, 결국 벡스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

도미닉은 이 모든 장면을 보고 회의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상처 입은 채 집에 돌아옵니다. 도미닉의 일탈에 지친 아버지는 아들에게 비아냥거리죠. 도미닉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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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역할 모델을 고른 소년
훌리건 영화들을 보다 보면 재미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많은 수의 훌리건 영화들이 ‘관찰자 시점’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훌리건스>에서는 영국에 여행 온 미국인 맷이 훌리건 사촌의 행동을 보며 차츰 동화됩니다. <어웨이데이즈>의 주인공이자 평범한 은행원 카티는 엘비스를 따라 훌리건들과 어울리죠. 이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받을 만한 역할 모델(role model)을 찾아 헤매던 소년 도미닉은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훌리건들 사이에서 자신을 챙겨주는 벡스를 아버지처럼 따릅니다. 그의 옷차림까지도요.

방황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젊은이들에게 훌리건 조직은 뭔가 새로운 기회 같고 또 대단한 모험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그 옛날, 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은 지루한 일상의 탈출구라면서 신나는 마음으로 전쟁터에 갔다고 하죠. 그리고 그 곳에서 처참함을 겪게 됩니다. 훌리건을 동경하던 영화 속의 주인공들도 대개는 마찬가지 운명을 맞이합니다.

도미닉은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년입니다. 건축업을 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일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만 도미닉은 지루하고 단순한 그 일에 흥미를 못 느낍니다. 그런 도미닉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역할모델로 벡스를 선택한 것이지요.

그러나 일견 강해 보이는 벡스 역시 라이벌 펌에 배신당하고는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장면을 통해 감독은 조직적으로 청소년들을 현혹해 끌어들이고, 일상의 탈출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훌리거니즘의 병폐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훌리거니즘이 판을 치는 이유가 단순히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개인의 폭력적 성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지 못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 도미닉을 맞는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차가운 비아냥거림만을 계속할 뿐입니다. 물론 가정이 사회적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은 맞지만 조직적으로 마수를 뻗는 훌리거니즘에 대항하기에 일개 가족은 그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풋볼 팩토리>도, <어웨이데이즈>도, 그리고 <더 펌>도 훌리거니즘과 극우주의에 대한 대책을 이 사회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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