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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릭 칸토나, 정신과 의사가 되다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룩킹 포 에릭>

에릭 칸토나를 아시나요?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맨유는 박지성뿐 아니라 기라성 같은 스타 선수들의 집합소였습니다. 루니, 긱스, 나니, 스콜스 등등.

그렇다면 여러분은 에릭 칸토나(Eric Daniel Pierre Cantona)를 아시나요? 이 선수 역시 과거 맨유에서 뛰었습니다. 지금의 루니나 박지성을 뛰어넘는 엄청난 슈퍼스타였죠. 1992년 11월부터 맨유에서 뛰기 시작한 이 프랑스인은 5년 동안 144경기에 출전하면서 64개의 골을 기록하였습니다. 당시의 경기를 보면 맨유 관중석에서 칸토나의 이름을 새긴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K리그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용병을 위해 관중석에서 일장기가 휘날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죠. 가뜩이나 사이가 안 좋은 영국과 프랑스. 하지만 칸토나는 너무나 뛰어난 활약을 보였기에 ‘잉글랜드인이 사랑한 유일한 프랑스인’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선수로서 그의 기량은 매우 뛰어났지만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여러 문제를 일으킵니다. 프랑스에서 활약하던 시절부터 동료 선수 및 감독과 언쟁을 벌이던 그는, 1995년 1월에 대형 사고를 칩니다. 바로 ‘칸토나 쿵푸킥’으로 유명한 사건이죠.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 FC)와의 원정 경기 도중 거친 플레이로 퇴장을 당한 칸토나. 그는 경기장을 떠나던 도중 자신에게 야유를 하던 크리스털 팰리스의 서포터를 향해 이단 옆차기를 날립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2주간 유치장에 갇히고 9개월간 출장 정지를 당합니다. 게다가 고국이 우승을 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세대교체의 영향으로 대표팀에 소집되지도 못하는 불운을 겪습니다. 그는 1997년 홀연히 은퇴를 선언합니다. 너무나도 감각적이고 화려했던 골과 플레이들을 유산으로 남긴 채 말이죠.

그러나 그는 사회 활동마저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사커(MLS) 진입을 노리는 뉴욕 코스모스 팀의 단장을 맡고 있고, 비치사커(beach soccer) 선수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영화배우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 영화에 조연이나 카메오로 출연했는데요 , 이번에 소개할 영화도 이에 해당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역할을 맡은 영화 <룩킹 포 에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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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룩킹 포 에릭>의 포스터.

만신창이가 된 어느 영국 서민. 왕년의 우상이던 에릭 칸토나를 만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영국 맨체스터에 살고 있는 우체부, 에릭 비숍(Eric Bishop)입니다. 가만히 보니 에릭 칸토나와 이름이 같군요. 비숍은 매우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첫사랑 릴리와는 이혼한 지 어언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두 번째 결혼한 아내와도 헤어졌고, 그러면서 의붓아들들을 떠안게 되죠. 그들은 불량배이자 문제아입니다. 백발이 다 되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들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던 그는 왕년에 자신의 우상이었던 에릭 칸토나를 상상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사실 비숍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맨유를 열렬히 응원해 오고 있는 서포터지요.

상 속의 칸토나는 비숍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게 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 해결하라고요. 칸토나의 조언에 따라 비숍은 먼저 첫사랑 릴리를 만납니다. 갑자기 그녀와 헤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죠. 오랜만에 비숍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오고, 모든 게 잘 풀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위험이 닥칩니다. 의붓아들 중 한 명이 갱단의 권총을 보관하게 되면서 일이 꼬이죠. 그 권총이 총격 사건에 연루되면서 비숍의 가족은 경찰과 갱단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모처럼 행복이 찾아오려는 찰나, 다시 불행의 그림자가 비숍을 덮칩니다. 하지만 상상 속의 칸토나는 비숍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친구들이 있지 않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라.”

결국 비숍은 고집을 꺾고 친구들에게 솔직히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 놓습니다. 경찰에 신고하면 갱단의 보복을 받게 되고, 그대로 권총을 보관하게 되면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는 상황. 친구들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비숍이 도움을 구하자 비숍을 위해 발 벗고 일어납니다.

사실 비숍의 친구들은 왕년에 축구장을 휘젓고 다니던 열혈 서포터 혹은 훌리건들이었죠. 친구들은 전형적인 축구 훌리건식의 방법으로 비숍을 구해 줍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축구팬이라면 정말 배꼽을 잡을 장면입니다. 이렇게 비숍은 세상과 친구, 그리고 가족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시 행복을 되찾게 됩니다.

칸토나 최고의 플레이는 득점이 아니라 패스였다

영화에서 에릭 칸토나는 비숍의 상상 속 칸토나를 연기합니다. 이 영화에서 칸토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칩니다. 정말 프로배우 뺨치는 진지함과 깊은 내면세계로 관객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칸토나가 말하는 것들이 모두 대본으로 주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자기 자신을 연기하면서 칸토나는 한때 슈퍼스타로 군림했던 자신의 애환을 같이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나락을 걷고 있는 비숍이 슈퍼스타인 칸토나는 그런 비참함을 모를 거라고 하자 칸토나는 이렇게 말하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들을 때면 슬펐다. 그 환호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 같아서.”

이 영화에서 칸토나는 ‘망나니 슈퍼스타’, ‘흠집 난 천재’로만 알려진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를 본인 입으로 말하죠.

“내 최고의 플레이? 그건 골이 아니었어. 패스였지….”

다들 아시겠지만 골을 혼자 넣을 수는 있어도 패스는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같은 팀 동료와의 플레이가 가장 의미 있었다는 칸토나의 말. 그 말을 듣고 비숍은 주변 친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엽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문제가 있다면 도망치지 말고 맞서야 합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왕년의 축구 스타 칸토나는 덤덤하게 이야기합니다. 마치 비숍의 정신과 주치의이자 인생 상담사처럼 말이죠. 상처 입은 인간이 치유 받는 과정이 감동적이고 재미있게 그려진 이 영화, 꼭 축구팬이 아니라도 한번 볼 만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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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칸토나. 출처=맨유 공식홈페이지


축구팬에게 있어 축구는 인생의 동반자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켄 로치(Kenneth Loach)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200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한 명감독이지요. 켄 로치 감독이 개인의 정신적 치유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때, 여러 소재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늙은 축구팬과 그의 왕년의 우상인 에릭 칸토나를 선택했을까요?

그것은 켄 로치 감독이 축구 종가 잉글랜드 사람이기에 축구가 축구팬에게 갖는 큰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영화 속에서 비숍이 실제로 칸토나를 만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숍에게 있어서는 축구가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지요. 영화 속에서 비숍은 옛날의 좋은 추억이 없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버스를 타고 무작정 원정 경기를 다니던 시절, 골 하나에 친구들과 관중석에서 좋아 날뛰던 시절… 무언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시절은 마냥 그러는 게 좋았지….’

아마 축구팬이 아니면 이 대사의 의미를 100%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것 하나 없어도 그저 자기 팀의 선전에 기쁘고, 푸른 그라운드를 보며 설레어 하고, 장거리 원정을 위해 주말을 다 바치고도 그저 신나는 그 시간들. 축구팬이기에 느낄 수 있는 기쁨이고 또 인생의 선물이지요.

영화에서는 비숍의 친구들이 술집에 모여 맨유의 경기를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술집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축구를 소재로 대화하고, 미국 경영자에게 넘어간 맨유를 두고 설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곤경에 빠진 친구를 돕기 위해 원정 버스를 타고 가다 맨유 유니폼을 입고 칸토나의 가면을 쓰고 갱단의 아지트에 침투를 하죠.

친구를 구해 준 다음에는 두 팔을 하늘 높이 펼치고 맨유의, 칸토나의 응원가를 부르죠. 정말 축구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 상담을 축구 스타와 하고,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축구팬인 친구들이 해결해 주고,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축구 응원가를 부르며 원정을 떠납니다. 이처럼 이 영화는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치유만을 다룬 게 아니라, 그 심리적 치유마저도 축구와 함께 하는 축구팬들의 열정을 같이 다루고 있는 것이지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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