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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목곰’ 김동주의 쓸쓸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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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곰' 김동주가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목곰’ 김동주가 소속팀을 찾지 못하고 쓸쓸한 은퇴를 맞이했다.

김동주는 31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17년의 현역생활을 마감한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시즌 종료 후 두산 보류명단에서 제외되어 소속팀이 없는 상태였다. 선수생활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팀을 찾았지만 그를 불러주는 팀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프로선수 등록마감일에 정든 유니폼을 벗기로 했다.

김동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가대표 우타자였다. 고려대 시절부터 ‘일본킬러’라는 명성을 얻은 김동주는 1998년 OB베어스에 입단하자마자 주전 자리를 꿰차며 타율 0.265 24홈런 89타점으로 두산의 기대주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거포의 상징인 타율 3할-출루율 4할-장타율 5할을 5년 연속으로 달성해 두산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가 되었다. 우즈-심정수와 함께 전설적인 ‘우동수’ 트리오의 중심축을 담당했고 2000년 5월 4일에는 잠실구장 최초 장외홈런을 쏘아 올리기도 했다. 팬들은 그에게 ‘두목곰’이라는 애칭을 붙여주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국가대표 김동주’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2002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등 한국야구 환희의 순간에는 언제나 김동주가 있었다. 온 몸을 던져 팀에 헌신하는 선수였다. 2006년 WBC 아시아예선 대만전에서 내야 땅볼을 친 뒤 1루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하며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왼쪽어깨가 탈골되었다. FA(자유계약)자격이 걸린 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을 던졌다. 김동주의 투지는 선수들의 투지를 일깨웠고 WBC 4강 신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라운드 안에서는 환하게 빛나는 선수였지만 밖에서는 아니었다. 해외진출이나 FA계약을 앞두고 중요한 시기 때마다 구단과 상의 없이 외부에 정보를 흘렀다.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협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한 일명 ‘언론플레이’를 일삼아했다. 또한 2004년에는 전화통화로 갑작스런 은퇴를 통보한 뒤 잠적했다가 한 달 만에 팬 카페를 통해 복귀를 선언했다. 부진과 이혼문제로 쌓인 스트레스로 인해 우발적인 행동이었지만 이후 대처가 공인에 걸맞지 못했다. 그 외에도 사생활 문제와 개인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들며 방망이도 무뎌졌다. 2011년 17홈런 75타점 장타율 0.475를 거둔데 비해 2012~13시즌 3홈런 36타점 장타율 0.334로 성적이 뚝 떨어졌다. 거기에 이원석이 주목받기 시작하고 김진욱 감독과의 불화설까지 터지며 경기출장마저 쉽지 않았다. 송일수 감독이 새로 부임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군에 단 한 번도 올라오지 못했다. 시즌 중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구단에 트레이드와 방출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감정의 골은 깊어졌고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야구선수 김동주를 더 오래 볼 수 있었다. 두산의 코치직 제의를 거절하고 자유의 몸이 된 김동주는 신생팀 kt와 꾸준히 접촉을 해왔다. 조범현 감독도 “본인의 의지나 팀을 생각하는 것이 좋게 느껴졌다”며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금액이 문제였다. 김동주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원했고 FA영입과 특별지명 등으로 큰돈을 쓴 kt는 요구 조건을 낮춰주길 바랐다. 결국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며 협상은 끝이났고 김동주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한국프로야구 통산 타율 8위(0.309), 타점 4위(1097개), 홈런 9위(273개), 장타율 10위(0.514)에 빛나는 김동주는 팬들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헤럴드스포츠=차원석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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