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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timeover의 편파야구 거침없는 다이노스] 'NC의 전설’이 스스로에게 내린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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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그는 타석보다 마운드가 어울리는 에이스였다.

18일 경기 결과: NC 다이노스 9-4 kt 위즈

21년 전 광주제일고 출신 에이스가 해태타이거즈(현 KIA) 유니폼을 입었다. 140km 중반대 속구와 제법 괜찮은 변화구를 가진 그는 첫해부터 1군 마운드에 올랐다.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8경기에서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0.22로 초라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입단동기인 LG 김재현에게 신인 최초 20홈런이라는 기록을 허용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학생시절에 반짝하다가 프로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지는 수많은 선수 중 한 명이 될 뻔했다.

길을 잃은 그를 구한 건 전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순철(현 SBS해설위원)이었다. 이순철은 슬럼프에 빠진 고졸투수의 은사와 동기였다. 이순철은 제자뻘 되는 후배에게 다가가 “타자하면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김응용 1군 감독과 김성근 2군 감독이 그의 타자전향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야수로 나선 첫 경기에서 홈런 2개를 쏘아 올리며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1998년 타율 0.303 19홈런 77타점으로 주전자리를 꿰찼다. 이듬해 타율 0.276 16홈런 55타점으로 주춤하며 백업요원으로 전락했다가 2000년 신생팀 SK 성영재와 트레이드 되었다.

SK의 황금기가 곧 그의 황금기였다. 그는 신생팀의 주장과 중심타자를 도맡으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경기장안에서는 2002년부터 4년 연속 20홈런을 터트렸고, 경기장 밖에서는 후배들이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2007년 다시 만난 김성근 감독과 함께 SK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후엔 4년 34억 원에 FA재계약을 맺으며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 남들이 평생 한 번 밟기도 힘들다는 한국시리즈 무대를 6년 내리 밟았다.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 잊고 있던 부상이 그의 무릎을 붙잡았다. 발단은 2005년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 그는 견제구를 피해 귀루하던 중 오른쪽 무릎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의사가 깁스를 권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부상부위의 피를 뽑아내고 진통제를 맞아가며 출전을 강행했다. 하늘도 그의 정성에 감동했을까. 4차전에서 선제 투런 홈런과 좌익선상 2루타를 터트리며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갔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많은 야구팬 가슴속에 남았지만 동시에 시한폭탄을 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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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시절은 그에게 황금기이자 암흑기였다.

결국 폭탄이 터졌다. 2008년 스프링캠프 훈련 중 무릎에 탈이 났다. 단 8경기만 뛰고 수술을 위해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환자복을 벗고 다시 유니폼을 입었지만 아픔은 남아있었다. 돌아온 그에겐 ‘FA 먹튀’라는 오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2009 시즌엔 타율보다 낮은 득점권 타율(0.277) 기록하자 타점이 로또처럼 나온다며 ‘로또준’(로또처럼 큰 한방을 터트려준다는 중의적 의미도 있다. 김진성의 ‘황제마무리’처럼...)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쾌활한 성격임에도 잠시 대인기피증을 앓았을 정도로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 FA 대박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기쁨보다 아픔이 많았던 4년이 지나고 두 번째 FA기회가 왔다. 그는 부상복귀 이후 최고의 성적(타율 0.300 18홈런 78타점)을 올리며 다시 날아올랐다. 많은 팀의 러브콜을 받았다. 다시 한 번 대박을 노릴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그는 돈보다 마음이 향하는 팀을 원했다.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호준 선수가 필요합니다. 이(호준) 선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함께 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지만 간절함이 가득 묻은 목소리. 진심이 담긴 세 마디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렇게 공룡군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의 역할은 SK 때와 같았다. 경기장 안에선 4번 타자로, 경기장 밖에선 주장으로 어린 선수들을 이끄는 것. 역할은 같았지만 무게감은 전혀 달랐다. 희망이 보였다. 퓨처스리그에서 고작 1년 뛴 후배들에게서 프로 10년차 같은 향기가 났다. 후배들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이 팀은 3년 안에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공룡군단은 ‘싹수’ 있는 팀이었다. 1군 진입 첫해부터 신생팀 최다승 타이기록(52승)을 일궈냈다. 많은 이들이 호성적의 비결로 찰리-이재학-에릭(현재 해커)-아담으로 이어지는 리그 최정상급 선발진을 꼽았다. 하지만 일등 공신은 따로 있었다. 4번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타율 0.278 20홈런 87타점을 일궈낸 주장이다. 회춘이라도 한 듯 8년 만에 20홈런 고지를 밟았다. 수비기여가 없는 지명타자임에도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가 1.4에 달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하위권을 맴돌던 팀 타율(9위, 0.244)과 팀 타점(8위, 485점)이 더욱 암담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마치고 김경문 감독이 “내년엔 4강을 향해서 멋지게 싸우겠습니다”라는 출사표도 던지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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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환한 웃음을 앞으로도 오래오래 보고싶다.

김경문 감독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3살짜리 아기공룡은 그 어떤 팀보다 빨리 가을이야기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운드는 여전히 튼튼했다. 가벼웠던 방망이는 FA로 건너온 이종욱과 손시헌, ‘포텐 터진’ 박민우와 나성범, ‘복덩이’ 테임즈가 묵직하게 만들었다. ‘나이테트리오’ 중심에 선 그도 23홈런 78타점으로 건재함을 보여줬다. 2년 내내 NC의 중심을 지킨 그에게 팬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떠받들며 존경과 감사의 뜻을 담아 ‘호부지’라는 애칭을 붙였다. ‘호부지’는 준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선제 2타점 2루타와 다시 앞서나가는 솔로포를 때리며 창단 포스트 시즌 첫 승을 이끌었다. 그 덕에 우리는 다음 포스트시즌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올 시즌을 앞두고 그는 많은 것을 놓았다. 이종욱에게 주장을 넘겨주었고 오랫동안 지켰던 중심타선에서도 광주제일고 직속후배 모창민을 위해 내려왔다. 시즌 전망도 밝지 않았다. 허리 부상으로 스프링 캠프를 온전히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역야구선수에겐 다소 많은 나이인 ‘불혹’이 딱지처럼 달라붙었다.

맞다. 그는 ‘불혹’이었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였다. 주변의 우려나 걱정 어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야구에 집중했다. 팀내 타자 최고참임에도 코칭스태프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타격폼을 수정했다. ‘몸쪽 공과의 정면승부’를 선언하며 당겨치기에 주력해 느린 운동반응속도를 만회했다(타이밍이 늦어도 당겨치기하면 자연스레 밀어치기가 된다). 그 결과 타율 0.312 14홈런 65타점(6월 17일 기준)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썼다. 홈런과 타점페이스는 전성기였던 2004년에 맞먹을 정도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NC의 전설이 될 선수다.

“300홈런은 정말 하고 싶은 거예요.” 가을이야기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 그의 모든 신경은 300호 홈런을 향해 있었다.

5월 30일. 고향 광주에서 299번째 꽃이 폈다. 그것도 팀이 5-4로 뒤진 상황에서 터진 개인 통산 9번째 만루홈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록의 순간이 금방 찾아오리라 믿었다. 이튿날 “승엽이 400홈런에 내 홈런이 묻히면 안 되는데”라는 너스레도 떨었다. 구단에서도 그의 300홈런 달성 이벤트와 기념상품을 예고하며 ‘곧 터질 것 같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

축포를 너무 빨리 터트렸을까? 기다리던 300홈런은 나오지 않고 지긋지긋한 아홉수가 이어졌다. 힘이 들어간 잔뜩 스윙은 허공만 갈랐고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기록 앞에서 긴장하는 건 여느 선수와 같았다. 14경기 동안 홈런포는 침묵했다. 아홉수에 시달린 채 맞이한 15번째 경기를 맞이했다. 경기 전 “(300호 홈런이) 빨리 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김경문 감독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홈런 말고 안타 두 개 치겠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동생들이 kt선발 정성곤을 두들겼다. 아웃카운트 하나 못잡고 2실점한 정성곤은 ‘멘붕상태’에 빠진 듯했다. 불혹의 베테랑에게 가운데 높은 체인지업을 던지고 말았다. 안타를 노린 그의 방망이가 가볍게 돌았다. 상쾌한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모두가 영광의 순간을 직감했다. 타구는 타격음이 수원구장에 울려 퍼진 순간 모두가 알았다. 드디어 터졌다! 그는 환한 표정으로 다이아몬드를 돌았다. 홈 베이스를 밟자마자 고향후배 모창민이 먼저 반겼다. 후임주장 이종욱이 꽃다발을 전했고, 김경문 감독이 더그아웃 밖까지 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형제 같은 아들들의 환호를 받으며 벤치로 향했다. 그는 벤치에 앉자마자 긴 숨을 토해내며 그간 지고 있던 부담감을 털어냈다. 이내 깊은 생각이 담긴 눈으로 그라운드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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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보고 싶었던 300홈런 엠블럼. 이젠 마산구장에서도 볼 수 있다. 사진=NC다이노스 공식홈페이지

개인통산 300홈런은 대단한 기록이다. 역대 7명(장종훈(340), 이승엽(397), 양준혁(351), 심정수(328), 박경완(314), 송지만(311), 박재홍(300))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7명의 면면도 화려하다. MVP, 홈런왕, 30-30클럽, 골든글러브등 ‘1인자’ 반열에 한 번씩 올라본 선수다. 그는 1등과 인연이 멀었다. 상이라고는 2004년 타점왕 딱 하나뿐이었다. 홈런왕도 못해봤고 골든글러브는 언감생심이었다. ‘2인자’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선수였다. 우승의 기쁨은 여러 차례 누렸지만 자신만을 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자기 기록보다 팀의 승리를 위해 헌신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조금씩 홈런이 쌓여나갔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욕심낸 타이틀이자 KBO리그에서 단 8명만 가진 ‘300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300호 홈런은 그동안 오로지 팀만을 위해 몸을 던졌던 스스로에게 내리는 ‘훈장’이 아니었을까?

기자는 팬의 이름을 빌려 또 다른 훈장을 수여하고 싶다. 바로 ‘NC의 전설’이다. NC가 써온, 그리고 써내려갈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앞에 살짝 나왔지만 다시 한 번 제대로 소개하겠다. 오늘 쏘아올린 역사적인 300홈런의 주인공은 ‘NC의 전설’ 이호준이다.

*Notimeover: 야구를 인생의 지표로 삼으며 전국을 제집처럼 돌아다는 혈기왕성한 야구쟁이. 사연 많은 선수들이 그려내는 패기 넘치는 야구에 반해 갈매기 생활을 청산하고 공룡군단에 몸과 마음을 옮겼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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