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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 산책] 박종팔을 KO로 잡은 ‘헤라클레스’ 강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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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WBC 크루저급 3위까지 올랐던 강흥원 선수.


한국 중량급의 역사는 1966년 6월 김기수(작고)가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시작됩니다. 김기수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자 뒤를 이어 1970년 유제두(46년생, 고흥)가, 1980년대엔 박종팔(58년생, 무안)과 백인철(60년생, 고흥) 쌍두마차가 한 시대를 풍미했죠. 이들이 해바라기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은 주인공이었다면 이들의 뒤안길에서 소리없는 침묵으로 달맞이꽃처럼 조연 역할을 했던 복서들도 많았습니다.

김기수를 중심으로 조연들은 강세철과 최성갑, 이금택, 이안사노 등이 포진해 있었고, ‘유제두 시절’엔 임재근을 비롯해 강흥원, 주호, 박남용 등이 활약했죠. 80년대 들어서는 박종팔과 백인철의 화려한 조명 뒤에는 노창환(61년생, 신도)과 정상도(61년생, 강진), 독사 이상호(57년생, 대원) 등이 활동했죠. 오늘 링사이드 산책의 주인공은 그중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남기고 떠난 강흥원입니다.

지난 주말 회기역 인근의 카페에서 강흥원 선배를 만나 주옥 같은 그의 복싱스토리를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오작교 역할은 전 KBC 밴텀급 2위 출신인 김성호(57년생, 부안) 선배가 했습니다. 강흥원 선배는 첫 인상이 이웃집 형님처럼 푸근해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무난히 취재를 마칠수 있었네요.

복서 강흥원은 1949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납니다. 영광은 일본에서 ‘성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은 강항 선생의 탄생지입니다. 그는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귀국했고,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간양록’이란 저서를 남겼죠. 간양록은 80년대 MBC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주제곡은 조용필이 불렀죠.

고려 때는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고 영광으로 유배되어 그곳 앞바다에서 잡힌 맛좋은 고기(법성포산 건조 참조기)를 진상하면서 ‘굴비’라는 명칭이 만들어졌죠. 자기가 비굴(非屈)하지 않다는 뜻으로 생선이름을 굴비(屈非)라고 지어 임금께 택배(?)로 보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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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흥원 씨는 현재 경동시장에서 수삼직판장을 운영하고 있다.


영광사람 강흥원은 15세에 상경해 청량리에 정착합니다. 청량리는 큰형인 강두원(43년생) 씨가 강한 카리스마와 폭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노조위원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한 곳입니다. 강흥원은 1970년 21살의 늦은 나이에 중산체육관에 입관해 채용석(31년생) 관장의 지도를 받습니다. 유장호, 정영근, 차의태 등 기라성 같은 복서들이 포진된 중산체육관에서 이들과 스파링을 하면서 기량을 향상시킨 겁니다.

강흥원은 그해 4월 제23회 전국신인선수권대회 라이트 미들급에서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한윤철(수원체)에게 패해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강흥원은 1972년 11월, 23세에 프로복서가 돼 박남용을 1회 KO시키면서 데뷔합니다. 이후 박남용과는 무려 7차례나 격돌해 4승3패를 기록한 라이벌 관계가 됩니다.

강흥원은 투타임 한국 미들급챔피언을 역임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차례 모두 박남용에게 타이틀을 탈취했죠. 강흥원은 1978년 6월, 전년도 우수신인왕(미들급) 출신의 ‘떠오르는 태양’ 박종팔(당시 20세, 3승<2KO>1무)과 1차 방어전을 치렀는데 KO승을 거뒀습니다. 박종팔의 우박처럼 쏟아지는 맹공에도 강흥원은 동요없이 침착하게 기회를 엿봤고, 종료직전 빈틈이 보이자 라이트훅을 제대로 꽂았는데 박종팔은 총맞은 노루처럼 푹 고꾸라졌죠. 강흥원의 완벽한 KO승이었습니다. 베테랑은 위기의 순간에도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손자병법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준 한 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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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임 한국 미들급챔피언 강흥원(좌측)과 최만성.


박종팔은 문화체육관에서 노량진 동아체육관까지 펑펑 울면서 걸어갔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죠. 그후 박종팔은 심기일전해 19연속 KO 퍼레이드를 연출하며 세계적인 복서의 반열에 우뚝 섰죠. 후에 박종팔은 지금껏 싸운 복서 중 백인철, 나경민을 훨씬 능가하는 펀치의 소유자가 강흥원 선배였다고 자평했죠.

1970년대 헤비급에서 레리 홈즈와 무하마드 알리가 펀치력만큼은 조지 포먼보다 어니 세이버스(74승<69KO>1무14패)의 파괴력을 더 인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박종팔의 얘기처럼 필자도 강흥원의 파괴력은 임재근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강흥원은 1975년 10월 주호(50년생, 15승<6KO>2무3패)와 타이틀 2차 뱡어전에선 9회까지 득점에서 앞서다가 10회 석연찮게 다운당하면서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앞서 1974년엔 72년 뮌헨 올림픽 대표인 임재근(50년생, 23승<21KO>1무5패)과의 라이벌전에서는 불의의 눈 부상으로 패하기도 했습니다.

강흥원을 옆에서 지켜본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이트 웰터급)이자 경흥체육관 후배인 김인창(57년생 화천)은 “강 선배는 연탄배달을 하면서 경기를 치렀죠. 당시 생활고만 겪지 않고 정상적으로 훈련했다면 유제두 선배는 몰라도 임재근, 주호 등 경쟁자들보다 한 수위의 기량을 보였을 것은 분명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강흥원은 1978년 12월 당시 동양챔피언 유제두의 21차 방어전이자 은퇴경기 파트너로 낙점되어 12회까지 인상적인 불꽃 파이팅을 선보였지만 유제두의 두터운 벽을 넘는 데는 실패했죠. 이 얘기를 하면서 강흥원이 개인적으로 유제두는 존경하는 선배였다고 회고했고, 이에 필자가 전화를 연결하자 깍듯이 존칭을 쓰면서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강흥원은 8년의 프로생활 동안 25전13승(8KO)10패2무를 기록하며, 전적 이상의 강한 임팩트를 남겼습니다. 강흥원은 1973년 2월 일본 나고야에 원정경기를 가 중견복서 시바다 겐지를 1회 실신 KO승을 거뒀습니다. 시바다는 에디 가소(니카라과)와 세계 타이틀까지 치른 일본의 중견복서였습니다. 이어 5년 후에도 일본 원정길에 올라 가나 국가대표 출신의 일본용병 피터 남보쿠에 또 다시 4회 실신 KO승을 거뒀습니다. 당시 남보쿠가 들것에 실려 나갈 정도로 강흥원의 펀치는 대단했습니다.

강흥원은 1980년 1월 10년 아래의 후배인 동아체육관의 유병래(59년 서산)와 타이틀 결정전을 치렀지만 2회에 타이틀을 양보하고 링을 떠났죠. 그때 그의 나이 31살이었습니다. 강흥원은 25전을 싸우면서 당대 최고의 복서들인 유제두, 주호, 임재근, 유병래, 박종팔 등과 진검승부를 피하지 않았죠. 앞서 소개한 바 있는 ‘구월산유격대’ 노창환처럼 전천후로 싸운 겁니다.

강흥원은 은퇴 후 경동시장 신관 앞에서 <흥원인삼>이란 상호를 걸고 수삼직판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흥 복싱체육관 모임의 회장을 오래도록 하면서 1년에 500만 원씩 통큰 기부를 하고 있죠. 후배복서인 김인창은 “후덕한 인품을 지닌 선배”라면서 존경을 표했습니다. 현재 덕소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인창 관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체육관에 강흥원 선배의 사진을 상징적으로 걸어놓았을 정도로 경외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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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명과 치열한 타격전을 벌이는 있는 김성호(좌측).


강흥원 선배를 필자에게 연결시켜준 김성호라는 전직복서도 소개해야할 듯합니다. 청량리 일대에서 개인사업하는 이 분은 강흥원과 40년지기로 호형호재하는 돈독한 관계입니다. 그는 현역시절 오성체육관 소속으로 24전을 뛰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숱한 강타자들과 맞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불굴의 파이터였죠. 24전을 뛰면서도 단 한 차례의 다운도 당하지 않아 당시 <펀치라인>의 기자였던 김영제(64년생, 서울) 씨가 ‘인간 방파제’라는 닉네임을 선물했죠.

김성호의 스승이자 70년 방콕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인 정영근(46년생, 부안) 관장은 “(김)성호는 실력에 비해 운이 지독히 따르지 않는 복서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예컨대 13전 무패를 기록한 밴텀급 챔피언 정종진(65년생, 동아체)과 1985년 7월 밴텀급 한국타이틀전을 치렀는데, 초반부터 우세하게 경기를 이끌다 3회 버팅으로 무승부가 선언되면서 다잡은 한국타이틀이 날아갔답니다. 김성호 씨는 세계챔피언 출신 오민근(62년생, 동아)을 꺾은 오차석(62년생, 부산 아세아체)을 8회 KO을 시켰죠. 그런데 신인왕 출신의.최재명(59년생, 천안)을 상대로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10회 무승부가 선언되자 멘탈이 붕괴됐고, 사실상 복싱을 접었다고 합니다.

정 관장에 따르면 김성호가 승패를 반복했던 결정적 이유는 핀치히터로 급조되어 출전한 경기가 대부분이었고, 영세한 체육관인 관계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승패가 뒤바뀐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김성호 씨가 지금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자신에게 분에 넘칠 정도로 잘한다며 비록 제자지만 고개가 숙여진다고 덧붙였습니다.

‘박종팔을 잡은 강타자’ 강흥원, ‘인간 방파제’ 김성호. 복싱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비록 유명 복서는 아니지만 나름 감동을 전하는 복서가 많았습니다. 복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이 그런 것 아닐까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보다 평범한 우리네 삶이 더 정겨운 법입니다. 요즘 복싱계가 사분오열로 몹시 어려운데, 이런 좋은 선배들을 중심으로 시멘트처럼 단합하는 복싱계의 청사진을 그려봅니다.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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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사장(왼쪽)과 강흥원 사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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