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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제1호 프로골퍼 월터 하겐 (상) - 프로골퍼는 클럽하우스에 들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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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골퍼의 신분상승을 위해 최고의 멋쟁이를 자처했던 월터 하겐.


영국 최초의 골프 스타는 지난 칼럼에서 소개했던 해리 바든이었다. 미국에서도 최초의 골프 스타가 나타나는데 그가 월터 하겐(Walter Hagen, 1892-1969)이다. 하겐은 US오픈 2승, 디오픈 4승, PGA챔피언십 5승을 각각 달성해 메이저 우승만 11승에 달한다. 당시 모든 프로골퍼들은 골프클럽 소속 헤드프로로 일하며 프로대회에 참가했다. 골프클럽에서 연봉을 받고, 레슨을 하고, 골프샵을 운영했다. 프로골프대회에 참가해 받는 상금은 부수입이었다.

그들은 정확한 골프 용어로 프로골퍼(Professional Golfer)가 아니고, 골프 프로페셔널(Golf Professional)이었다. 월터 하겐은 골프클럽의 헤드프로 자리를 사직하고, 프로대회 상금과 시범경기의 수입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최초의 프로골퍼였다. 역사상 오직 플레이만을 자기의 직업으로 삼은 최초의 선수였던 것이다.

어린 캐디의 꿈

여덟 살부터 뉴욕 주의 로체스터 컨트리클럽에서 캐디로 일하던 하겐의 가장 큰 소망은 부자 멤버들과 같이 멋진 옷을 입고 클럽하우스에 들어가서 식사를 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분의 차별이 확실했던 시대였으므로 헤드프로도 클럽하우스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클럽하우스는 캐디가 감히 꿈꿀 수 없는 멤버들만의 공간이었다.

13세 때 하겐의 재능을 알아 본 멤버들이 코스에서 라운드를 허락해 주었고, 14세가 되어서 프로샵에서 일했으며 20세에 그 골프클럽의 헤드프로가 되었다. 1912년에 평생 처음으로 골프대회에 출전했는데 아마추어 대회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겐이 프로대회인 캐나다 오픈에 가게 된 것이다. 시합 결과 하겐의 성적은 11등이었고 첫 출전에 좋은 성적이었지만, 크게 실망하며 돌아왔다. 프란시스 위멧이 해리 바든을 꺾은 그 유명한 1913년 US 오픈에서 4등을 했지만 위멧의 우승 때문에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14, 1919년 US오픈 챔피언

1914년 US오픈에서 스물 한 살의 하겐이 드디어 우승을 하게 된다. 홈 클럽인 로체스터 컨트리 클럽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식을 해 주고 연봉을 인상해 주었지만 하겐의 신분은 변하지 않았다. 대회에 나가는 기간과 횟수를 통제 받는 것이 변하지 않았고 챔피언을 클럽하우스로 초대해 주는 멤버도 없었다. 수입은 늘었지만 신분차별에 대한 하겐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1916년 골프 프로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PGA OF AMERICA'가 설립될 때 하겐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대회에 출전해도 아마추어 선수들은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하고 프로들은 밖에서 샌드위치를 먹어야 하는 2류 인생이 프로의 삶이었다. PGA가 설립되면서 프로들은 부당한 대우에 저항할 수 있는 구심점을 가지게 되었다.

1918년 하겐은 디트로이트의 신설 명문 클럽인 오크랜드 힐스 컨트리클럽의 헤드프로로 자리를 옮겼다. 어릴 때부터 캐디로 일했던 로체스터 컨트리 클럽에서는 캐디의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로 옮긴 후 멤버들인 지역의 유지들과 어울렸지만 유리천장과 같은 장벽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싶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멤버 아래의 계급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하겐은 우선 복장을 최고로 갖춰 입었다. 잘 생긴 외모에 멋진 복장으로 하겐이 나타나면 어디서나 빛이 났다. 1919년 US 오픈에서 하겐은 마이크 브래디와 18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 후 디트로이트로 돌아간 하겐은 클럽의 헤드프로 자리를 사직하고 플레이만 하기로 결심했는데 골프 역사상 최초의 프로골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멤버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두 번째 US 오픈 우승으로 하겐은 미국 최고의 골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광고계약도 많아져서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점점 더 부자가 된 하겐은 외모를 치장하기 위해서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첫 번째 디오픈, 클럽하우스와의 갈등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해 디오픈이 중단되었다가 1920년에 다시 개최되기 시작했다. 하겐은 디오픈에서 우승하여 그 동안 영국으로부터 받았던 수모를 갑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뉴욕항에서 배를 타면 일주일이 걸려서 영국에 도착하므로 시간과 비용의 투자가 컸지만 하겐은 개의치 않았다.

1920년 디오픈은 잉글랜드의 로얄 싱크포트 골프클럽에서 개최되었는데 첫 영국 원정에 나선 하겐이 도착했다. 연습라운드 때 옷을 갈아입기 위해 클럽하우스의 락커로 들어가려던 하겐에게 흰색 제복을 입은 종업원이 황급히 달려왔다. 프로들은 락커를 사용할 수 없으니 프로샵에 있는 허름한 방을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하겐은 차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연습라운드를 했다.

시합 첫날 하겐은 제복을 입은 운전수를 고용해서 다임러 리무진을 타고 나타났다. 리무진을 클럽하우스 정문 앞에 주차하고 내리는 하겐의 모습은 영국의 프로들과 너무 다른 멋쟁이였다. 점심은 근처 최고급 호텔에서 배달 시켜 차 속에서 먹었다. 클럽 매니저가 차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하겐은 거절했다.

전통에 도전하는 하겐의 행동들은 영국과 미국의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하겐은 예선을 통과한 54명 중 53등으로 끝났다. 하겐의 대회 출전 역사상 이렇게 수치스러운 결과는 없었다. 바닷바람을 얕잡아 본 것이 화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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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겐이 인버니스 골프클럽에 기증한 대형 벽시계.


1920년 프랑스 오픈 우승

영국까지 와서 창피만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하겐은 프랑스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에서도 클럽하우스에 프로의 출입이 금지되는 것은 영국과 마찬가지였다. 옷을 갈아입으라고 제공된 프로샵의 구석에는 벽에 못이 몇 개 박혀 있을 뿐 악취가 나고 있었다.

하겐은 영국에서 온 톱 골퍼인 조지 던컨, 아베 미첼 등과의 회의를 주관한 후 골프 클럽의 회장을 찾아가서 락커를 쓰지 못한다면 톱 골퍼들이 대회에 불참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골프 클럽에서는 결국 락커를 프로들에게 개방했다. 하겐은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프로에게 클럽하우스를 개방한 1920년 US오픈

1920년 US오픈은 오하이오 주의 인버니스 골프클럽에서 개최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클럽하우스 문제로 갈등을 빚고 돌아온 하겐은 주최자인 USGA에 공식적으로 프로골퍼들의 클럽하우스 사용을 요구하고 나섰다. 거절 당할 경우 전년도 챔피언으로서 출전을 거부하든지 영국에서처럼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압박했다.

USGA는 하겐의 압박에 굴복하여 클럽하우스의 락커와 식당을 완전히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참가했던 미국 프로들과 영국에서 원정 온 해리 바든, 테드 레이는 감격했다. 이제 프로가 아마추어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겐은 이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뜻에서 동료 프로들과 의논하여 모금을 했고 인버니스 클럽하우스에 높이 2.5m의 거대한 벽시계를 선물했다. 벽시계에는 작은 글귀가 남겨졌다.

“신은 인간을 재산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현재 어떤 사람인가를 보고 평가할 뿐이다. 이 메시지는 시계의 종이 울릴 때 마다 인버니스의 목소리로 멀리 퍼져 나갈 것이다.”

이 벽시계는 지금도 인버니스 클럽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다.

영국의 클럽하우스도 개방시킨 월터 하겐

1928년 하겐은 잉글랜드의 로얄 세인트 조지 골프 클럽에서 세 번째 디오픈 우승을 달성했다. 강풍 속에서 열린 마지막 라운드에 영국의 에드워드 왕세자(킹 에드워드 8세)가 갤러리로 따라왔다. 골프 매니아였던 왕세자는 시상식에서 직접 우승컵을 수여한 후 하겐에게 며칠 함께 머물며 골프를 치자는 제안을 했다. 왕세자의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라운드 후 왕세자와 하겐이 점심식사를 위해 클럽하우스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왕세자가 매니저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영국의 전통상 프로골퍼는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들은 왕세자는 크게 화를 내며 명령했다.

“그 전통을 당장 없애고 프로골퍼가 자유롭게 클럽하우스에 출입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영국 전체 골프장에 적용하라.”

새로운 전통에 의해 클럽하우스에 들어가게 된 영국의 프로골퍼들은 감격하며 하겐에게 감사했다. 다음 날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클럽의 클럽하우스가 개방되었고 프로골퍼들이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프로골퍼가 좋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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