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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미국의 삼총사 바이런 넬슨-샘 스니드-벤 호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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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기록이 많은 스니드의 별명은 '미스터 장수'였다.


‘미국의 삼총사’ 중 샘 스니드는 한국의 골프 팬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유익하면서도 재미 있는 이야기를 많이 남겼다. PGA 투어 최다승인 82승을 기록했고, PGA 최고령 우승 (52세 10개월 8일), 메이저 대회 최고령 컷 통과(67세 2개월 7일)의 기록도 세웠다.

그의 별명은 ‘미스터 장수’(Mr. Longevity)였다. 67세에 PGA 대회에서 그의 첫 번째 에이지 슈트를 기록한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에이지 슈트를 했고, 90세에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 골프를 쳤다.

현재 타이거 우즈가 PGA 79승을 기록하고 있어서 스니드의 최다승 기록이 경신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시골꼬마

스니드는 버지니아 주의 시골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 2km나 떨어져 있어서 언제나 혼자 놀아야 했고, 눈이 오지 않으면 맨발로 다녔다. 스니드의 집안은 조상 때부터 타고난 거인들이었지만 스니드는 키 180cm에 몸무게 85kg으로 특별히 큰 체격은 아니었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스니드는 5km나 떨어진 골프장에 가서 캐디를 지원했는데, 35kg의 무게를 들어올려야 합격할 수 있었다. 어린 스니드는 35kg을 거뜬히 들어 캐디가 됐다. 이미 골프를 치고 있던 형들이 어린 스니드가 골프클럽을 만지지 못하도록 했기에 그는 모든 것을 혼자 배워야 했다. 자동차 안테나 같은 막대에 주워온 헤드를 달아서 공이든 돌멩이든 스윙으로 쳐 냈다. 안테나가 휘청거려서 템포가 느린 스윙을 해야만 공을 칠 수 있었는데 이 때에 익혔던 리듬과 템포가 스니드의 스윙에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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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샘 스니드의 모습.


슈퍼루키의 등장

고등학교 때 스니드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미식축구, 농구, 야구를 즐겨 했으며, 특히 단거리 육상에 능해서 근처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스니드는 골프 선수가 되기로 결심하고 인근 골프장의 프로샵에 취직해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했다. 1931년 프로가 된 스니드는 1936년 버지니아 주의 지방 골프 대회에서 우승한 후 1937년 PGA 투어의 루키로 데뷔했다.

스니드는 루키 시즌에 최장타자로 인정받으며 PGA 5승을 챙겼고 상금랭킹 2위가 되었는데, 골프 역사상 루키로서 스니드과 같은 성적은 타이거 우즈를 포함한 어떤 선수도 이루지 못했다. 두 번째 시즌인 1938년에는 8승을 올리면서 상금 랭킹 1위가 되었다. 처음 두 시즌에서 13승을 거둔 스니드는 ‘삼총사’ 중 가장 앞서 나갔는데, 당시 바이런 넬슨이 6승을 하고 있었고 벤 호건은 아직도 첫 번째 우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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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우승 후 그린자켓을 입은 벤 호건과 함께. 마스터스에서 호건과 스니드는 1951년부터 번갈아 우승했다(51, 53년-호건 52, 54년-스니드).


샘 스니드와 벤 호건


스니드의 두 번째 전성기는 우연히도 1949년 2월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로 대회출전이 불가능해졌을 때 시작됐다. 1949년 마스터스와 PGA 챔피언십을 포함한 6승, 1950년 10승을 올리며 호건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1950년 1월에 열린 LA 오픈은 호건이 자동차 사고 후 컴백하는 첫 대회였다. 아직도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라운드를 하는 호건을 보기 위해 첫 날부터 9,000명의 관중이 몰렸다. 호건이 마지막 라운드에서 69타를 치며 합계 4언더파 280타로 사실상 우승이 확정된 듯했다. 심지어 호건을 위해서 우승 축하파티가 시작됐다.

그런데 필드에는 아직 위대한 샘 스니드가 플레이하고 있었다. 7홀을 남기고 5타가 뒤졌기에 스니드가 호건을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골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니드는 12, 13, 15, 17, 18번 홀에서 버디를 몰아치며 동타를 만들어 호건의 우승 축하파티를 중단시켰고, 다음 날 연장전에서 호건을 제압했다. 스니드는 1954년 마스터스 연장전에서 만난 호건을 제압함으로써 호건에게 연장불패를 증명했다.

샘 스니드의 스윙


스니드의 스윙은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벤 호건과 많이 달랐다. 호건의 스윙은 과학적이고 기계적이었으며 아주 빠른 템포의 스윙이었지만 스니드는 느린 템포이고 부드럽지만 힘이 넘치는 스윙이었다. 호건의 스윙은 연구와 연습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스니드의 스윙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 스니드는 ‘필 플레이어(feel player)’였던 것이다. 그는 호건과 함께 플레이를 하게 되면 템포가 빠른 호건의 스윙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스니드가 오랜 세월 승승 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동료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샘은 독수리의 눈과 표범의 우아한 유연함과 사자의 힘을 가졌다.” 스니드는 페어웨이에 나타난 들고양이를 쫓아가서 맨손으로 잡을 만큼 민첩했다. 또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양손잡이였다.

그러나 최장타자 스니드의 스윙을 정의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힘이 아니라 리듬, 템포, 타이밍, 밸런스였다. 그의 스윙에서 우아한 리듬과 템포는 역사상 최고로 평가 받는데, 골프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스니드의 스윙 동영상으로 장시간 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동영상 참조).

샘 스니드의 스윙영상


이루지 못한 커리어 그랜드 슬램

스니드은 1942년 PGA 챔피언십에서 첫 번째 메이저를 우승했고, 마스터스 3회, 디 오픈 1회, PGA 챔피언십 3회 등 메이저 7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US 오픈에서는 2위만 4차례 기록하며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이루지 못했다.

루키 때부터 촌스러운 시골뜨기 취급을 받아온 샘 스니드는 USGA와의 관계가 나빴다. US 오픈의 중요한 고비마다 USGA로부터 불리한 차별대우를 받았던 스니드는 그 역경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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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의 샘 스니드.


* 박노승 : 건국대 산업대학원 골프산업학과 겸임교수,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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