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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마있는 명소] 단양팔경③ 사인암--풍류객 詩心 품은 ‘대자연의 병풍’
[헤럴드경제=단양]누군가가 ‘자연에 새긴 인간의 작품’을 훔쳐가려 했다. 그 큰 바위를 다 자르긴 했는데 그것 마저 무거워 차마 들고가진 못했다. 그 바람에 그 큰 바위는 흉하게 두 동강이 난 채 누워있다.

태백산맥에서 빠져나온 소백산맥 줄기가 소백산 연화봉을 지나 서쪽 월악산으로 향할 즈음, 산맥이 남쪽으로 휘어지며 북쪽 땅을 끌어안고 있는데 그 곳이 단양 대강면이다. 그 산 남쪽으로는 경북 문경, 예천이다.

이 산맥에서 발원해 북쪽의 남한강을 향해 흘러내리는 청정계곡이 남조천인데 두 개의 시내가 Y자로 한데 모여 사인암 앞에서 큰 내를 이룬다. 신선이 노닐기에 딱 좋은 곳, 조선의 명망가들이 두루 거쳐갔다. 추사 김정희가 감탄하고 단원 김홍도가 반해서 그림을 그렸다.

사인암 전경

내천 건너편 도로에서 바라보면 높이 50m 안팎의 높다란 바위탑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혹자는 자연 병풍 같다고도 표현한다. 사각형의 바위 수십개를 정교하게 짜맞춘 듯 세운 탑 처럼 솟아 절경을 빚었다. 혹은 커다란 바위표면에 예리한 칼로 밭전(田) 자 모양으로 잘라 맞춰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신의 영역이 아니고서야 창조할 수 없는 걸작이다. 만약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면 이것 역시 불가사의로 꼽아줘야겠다. 정상의 바위 틈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한 줌의 흙기운을 받아 수백년 함께 하고 있다. 자연 속의 분재다.

사인암을 양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DSLR 카메라의 화이트밸런스 등도 달리 해서 서로 다른 컬러를 연출했다.

사인암(舍人巖)은 이곳 단양 출신의 고려 말 학자 우탁(禹倬:1263~1343년) 선생이 정4품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때 즐겨 찾은 곳이라 해서 훗날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 임제광(林齊光)이 그를 기리기 위해 사인암이라 불렀다. 즉 벼슬명에서 따온 이름으로 단양팔경 중 하나가 됐다.

어떤 사람들은 내천을 사이에 두고 이쪽 마을 도로에 서서 사진 몇장 찍고 가고 어떤 이들은 사인암에 다가가 바닥의 넓다란 바위를 뛰어다니다 돌아선다.

사인암은 그렇게 보면 겉모습만 본 것이 된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선의 수많은 풍류객들이 남긴 숨결이 서려있다. 이 절경을 음미하고 즐겼던 사람들의 생각까지 엿보면 사인암에 더 애착이 간다. 옛 선비들은 왜 사인암을 찾았을까. 그리고 어떤 심정으로 노래했을까. 선현들은 이 풍광을 즐긴 후 후손들에게 수많은 ‘쪽지’를 남겼다.

사인암의 위쪽부분 모습

내천을 건너는 출렁다리 위에서 한참 동안 풍경을 찍었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은 벽면은 푸른빛이 바랜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웅장한 모습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됐다. 답사하며 설명하시던 이해송 선생님이 “진짜 봐야 할 게 있다”며 따라와 보란다.

사인암 앞 내천으로 내려가니 넓다란 바위들이 널렸다. 그 중 한쪽엔 넓적바위에 장기판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다. 둘이 함께 앉아 장기 한 판이라도 두고싶은 심정이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단다. 그 옆으로는 바둑판도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바둑판을 어떤 ‘재주좋은’ 사람이 잘랐다. 다 자르긴 했지만 무거워 옮길 수 없어 못가져 갔다고 한다. 선현들은 만들어서 함께 즐겼는데 어느 후손은 개인용으로 소장하려 했던 것이다. 함께 해서 더 좋을 물건을 잠시 ‘나쁜 생각’으로…

사인암 바닥의 바위에 그려진 장기판(왼쪽)과 바둑판. 바둑판은 누군가가 잘랐지만 무거워서 갖고가진 못했다.
사인암의 여러 모습들

아랫쪽에서 절벽을 향해 쳐다보면 엄청난 바윗돌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칼로 자른 듯한 예리한 모서리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단양팔경 중 사인암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선생님은 사인암 밑에서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한자(漢字)들을 줄곧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는 다 알아듣기도 벅찬데 선생님은 신이 나서 열정적으로 설명을 쏟아붓는다. “이건 꼭 봐야 한다. 이것도 반드시 알아둬야 한다”며 명강의를 하신다. 이 선생님은 한학(漢學)에도 조예가 깊으신 분이다. 여기에 크고 작은 글씨가 무려 200개가 넘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그럼 사인암(舍人巖)이 사인암(sign암)이 됐네요”라고 했더니 크게 웃으신다. 큰 벽면에 마치 롤링 페이퍼 돌리듯 유식자들이 글을 남겼다.

자연이 빚은 바위에 글을 새긴게 어쩌면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 모두를 합쳐 선현들이 남긴 하나의 유산으로 이해하고 봐야 할 것 같다.

사인암에 새겨진 각종 글씨들. 알고보면 더 재밌다.

이곳에 들른 조선 대표 풍류객과 묵객들은 사인암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고 노래했을까.

“有暖芬盡 有色英 / 雲華之石 愼莫鐫名” (유난분진 유색영 / 운화지석 신막전명)
“향기는 날로 더하고 빛 또한 영롱한데 / 구름꽃 같은 절벽에 삼가 이름을 새기지 마라”
그러고도 이름 새긴 사람이 조선후기 원령(元靈) 이인상(李麟:1710~1760)이다. 1735년 진사에 급제, 북부참봉, 음죽현감을 지냈다. 서화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렸고 인장(印章)을 잘 새긴 것으로 유명했다.

“獨立不懼 遯世無憫” (독립불구 둔세무민)
“홀로서니 두려운 것이 없고. 세상을 은둔하니 근심이 없다”
조선후기 문인, 화가 윤지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낙관이다.

“卓爾弗群 確乎不拔” (탁이불군 확호불발)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바가 아니며, 확실하고 단단해서 꿈쩍도 않는다”
조선 영조 때 단양 116대 군수 조정세의 글씨로 추정된다.

“退藏 (雲搜)” (퇴장 운수)
“물러나 은둔하여 숨는다”
호가 운수라는 사람의 글이나 그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하다.

“一柱擎天 百川廻欄” (일주경천 백천회란)
“치솟은 절벽은 하늘을 움켜잡고, 골 곧아서 흘러 온 물은 굽이쳐 흐른다”
1807년 충청도 관찰사, 1829년 우의정을 지냈던 온성(溫城) 정만석(鄭晩錫)의 글인데 훗날 외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로 일컬어졌다.

“朗原君 重遊” (낭원군 중유)
‘중유’라는 말은 ‘거듭 노닐다’ 라는 뜻이다. 낭원군은 선조의 손자인 인흥군 영(瑛)의 아들 이간(1640~1699)이다. 1693년 태백산 사고에 준원록을 갖고 가는 길에 들러 흔적을 남겼다. 낭원군은 학문에 능하여 시가에 뛰어났고 30수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

“金宗漢” (김종한)
김종한(1844~1932)은 1897년 함경도 관찰사였으나 1910년 이완용이 조직한 친일단체 정우회(政友會)의 총재직을 맡았던 인물로 그 공로로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가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은 아마도 친일행위를 하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묵객들 역시 사실에 가까운 화법을 구사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자신의 상상력까지 펼쳐 사인암의 독특한 미를 표현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김홍도는 주변은 빼고 사인암만을 부각시켰다. 그는 고민고민 하며 그렸지만 1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방운은 사인암에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화폭에 광범위하게 담았으며 정선은 사인암 옆의 폭포까지 끌어와 또다른 느낌의 사인암을 표현했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화폭에 담은 사인암의 모습. 왼쪽부터 김홍도, 정선, 이방운 작품

사인암 옆에 보면 좁은 계단이 있는데 올라가면 암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터에 삼성각이 있다. 각종 기도에 효험이 좋다는 암자다. 여기 암벽에도 글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다.

사인암은 산수를 찾아 풍류를 읊었던 조선 선비들의 흔적이 구구절절 서려있는 대표적인 명소로 옛 선비들에게 감성을 자극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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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팔경 ‘상선암ㆍ중선암ㆍ하선암’ : 단양팔경의 또 다른 멋진 바위군이다. 사인암에서 머잖은 곳의 하천을 따라 있다. 황장산(1077m)과 문복대(1074m)에서 발원해 흘러내리는 선암계곡을 따라 절경이 펼쳐지는 이 곳을 삼선구곡(三仙九曲)이라 부르는데 이곳의 바위에도 예외없이 풍류객들이 멋진 풍경에 취해 이름과 글을 빼곡히 남겼다.

이 삼선암이 있는 계곡은 특히 여름철 피서객들이 몰리면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물놀이 즐기면서 바위에 새겨진 글을 찾아보면서 옛 선비들이 이 경치를 노래한 시심을 짚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경북 문경에서 올라오는 59번 국도를 따라 이 하천도 함께 북으로 내달린다.

상선암은 제일 상류에 있는데, 하천과 도로 사이에 몸을 묻은 큰 바위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러 개의 바위들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다소 소박한 느낌이다.

상선암-중선암-하선암(왼쪽부터)

조선시대 권상하(權尙夏)는 왕이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했지만 사양하고 이곳에 수일암을 짓고 자연을 즐겼는데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중선암은 물 흐르는 하천에 몸을 담그고 있어 여름철 휴양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四郡江山 三仙水石 / 崇視 九十年 丁酉秋 觀察使 尹憲柱 書” (사군강산 삼선수석 / 종시 구십년 정유추 관찰사 윤헌주 서)
중선암의 옥염대에 새겨진 각자로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윤헌주(1661~1729)의 글씨다. 사군(四郡)은 당시 단양, 영춘, 제천, 청풍을 말하는데 이 중 삼선구곡의 수석이 가장 뛰어나다고 기록했다. 윤헌주는 동부승지, 충청감사, 도승지, 함경도 관찰사, 한성부판윤, 평안감사, 영의정에 추증됐던 인물이다.

하선암의 바위는 커다랗고 둥글게 생겼다. 네개의 바위가 서로 몸을 맞대고 모여있는 모습이 경이롭다. 이곳 바위에도 수많은 글을 새겼는데 최근 누군가가 그 글 하나를 망가뜨려 함께 답사간 이해송 선생님도 깜짝 놀랐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필자와 함께 온 날 망가진 글자를 보고 무척 놀라셨다.

“明紹丹竈” (명소단조)
‘명소’는 이명(李明)과 이소(李紹) 형제를 말하는데 이들은 사인암에 처음 석축을 쌓고 명소정을 건립해 청유했던 사람들로 여기에 이 글을 새겼다고 한다.

“雲仙九曲” (운선구곡)
운선구곡은 남조천(옛 이름은 운계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펼쳐진 아홉군데의 경승지를 말한다. 1곡- 대은담, 2곡- 황정동, 3곡- 수운정, 4곡- 연단굴, 5곡- 도광벽, 6곡- 사선대, 7곡- 사인암, 8곡- 선화동, 9곡- 운선동이다. 운선구곡을 명명한 사람은 조선 영조때 참판을 지낸 경삼 오대익(吳大益: 1729~1803)이다. 1955년 단양군수를 역임한 김상현의 저서 ‘단양팔경’에 오대익이 교리시절에 퇴락한 수운정을 중창하면서 수운정을 중심으로 운선구곡을 명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선암의 바위 틈엔 기(氣)를 받는 곳이어서 최근까지도 무녀들이 촛불을 켜고 기를 모아가기도 했다고 이해송 선생님은 설명해 줬다.

글ㆍ사진=남민 기자/suntopi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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