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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광장-김상복 한국코칭수퍼비전아카데미 대표] 시습과 시숙을 보장하는 리더십
언제나 ‘찾기만 하는 사람(searcher)’이 있다.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늘 무엇인가 찾거나, 되기 위해 준비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 뒤 돌아 보면 목표 8부 능선 정도에 그만두거나, 방향 바꿀 이유가 생겨 항상 다른 길의 초보자로 머물러 있다. 당연히 자신에 대해 불만과 부족감을 갖고있다. 누구든 빠져 있는 늪에서 자기 머리를 잡고 나오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자기 손을 잡아주려는 사람의 손을 놓거나 사람을 바꿔 버린다. 자신에 대해 미진한 느낌을 갖고 있는 정체성 혼미 또는 유실이다. 그래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배우거나 찾기만 한다.

누구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고, 매일 새롭게 자신을 가꾸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 창조적 능력을 구현하는 자아 실현이 생명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펙타클 사회는 이를 흡수해 버린다. 프랑스 학자 기 드보르에 의하면 스펙타클 사회는 발전만이 유일한 목표이고 사람들의 체험과 직접경험으로 사회를 보기 보다는, 전문적 매개체의 스펙타클한 진동과 현란한 이미지에 의존해 세계를 보게 만든다. 이 안에서 개인은 자신의 자율적 운동과 신체리듬이 스펙타클 사회가 조성하는 음조에 조응 해 진동한다. 그래서 변화하고 새롭고 싶은 개인의 욕구도 사회의 진동과 타인들의 요구에 더 휘둘리게 된다.

스펙타클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사람들’. 자기 정체성이 취약해 사회적 요구와 리듬에 휘말리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속도와 진동에 맞추다 스스로 혼미에 빠지고 정체성이 유실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손가락으로 간단히 표시하는 인터넷 ‘좋아요’와 ‘나 홀로 혼자의 동굴’에 머물기 보다는 그래도 길을 찾아 나섰다는 점이 조금은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딱 거기 까지다. 그 길에 체류하고 있거나, 걷고 있는 군중 속에 홀로 남들 따라 걷는 것 뿐이다.

변화를 원하거나 그 과정을 세심하게 음미하고 싶다면, 시습(時習)과 시숙(時熟)을 감내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현재 상태나 지금 모습에 진저리가 나서 궤도이탈을 꿈꾼다면 꼭 필요한 처방이다. ‘때때로 배우고 익힘’을 칭하는 ‘시습’은 논어에서 보이고, ‘시숙’은 제철에 ‘오곡백과가 익어감’을 뜻하는 바 명심보감에서 보인다. 그러나 단어의 의미를 다시 다듬고 싶다. ‘시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반복해 갈고 닦는 일’을 시습, ‘시간 안에서 시간과 함께 본연의 것이 완성되어 익어감’을 뜻하는 것이 시숙이다. 누구든 무엇인가 새롭게 나아가고, 원하는 바가 되고자 한다면 시습과 시숙을 거쳐야 할 일이다. 그 변화와 새로움이 자기만의 고유함을 찾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변화를 위한 행동, 변화(행동) 관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리더라면 모든 사람의 변화에는 시습과 시숙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나름의 변화를 위한 안전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리더가 갖고 있는 변화 속도감이나, 인식에 맞출 일이 결코 아니다. 모든 과일이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각기 다른 속도로 익어가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누구든 자기의 변화 속도를 벗어나 좀 더 가속하거나 고도를 올리는 일, 더구나 궤도를 수정하는 일은 정말 중력이탈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은 변화를 외치는 리더 자신도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이다.

시습과 시숙을 염두에 두지 못하는 리더는 스펙타클 사회의 진동에 자기를 맡기고 있기에 아주 편하게 타인을 고정된 시선으로 묶어 둔다. ‘넌 원래 그래. 결코 변할 수 없어’ 이렇게 부하직원을 바라본다. 이런 시선 고정화는 곧 독(毒)이다. 시습과 시숙을 갖지 못하면 변화나 발효를 못하고 썩는다. 뒤따르는 이에게 이런 리더는 독성인간이다. 

newlifecrea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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