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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대통령과 의전
기자가 되기 전 공기업에 있을때다. 당시 전산실에 근무했는데, 어느날 장관이 순시(당시 표현은 그랬다)한다고 했다. 장학사가 온다고 입으로 호호 불며 창문을 닦던 초등학교때가 생각났으나, 그래도 우리 사업소에 장관이 오신다니 깔끔한 인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간 틈틈이 청소했고, 종이 박스 등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직원들에겐 임무가맡겨졌다. 내 역할은 전산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장관이 오시면 정중히 인사하고, 내부로 안내하는 게 내 임무였다. 약간의 예행연습도 했다. 장관이 온다던 당일이 됐다. 오전 11시30분 정도에 도착한다고 했다. 20여분전부터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온다는 사람은 소식이 없었다. 점심시간이 12시였는데, 밥도 못먹고 기다렸다. 지겨웠지만 그래도 방심할때 들이닥칠 수 있어 정자세를 유지했다. 손발이 저렸다. 방문 예정시간이 후딱 지나고, 한시간쯤 됐을까. 12시30분쯤에 장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수행단과 함께 몰려왔다. 악수 하려 손을 내밀려고 하는데, 장관은 나를 쳐다 보지도 않은채 전산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손이 머쓱해졌다. 분명 상사로부터 “장관이 손을 내밀면 악수한뒤 안내를 하라”고 몇번이고 들었다. 장관 뒤를 재빨리 따라갔으나, 그는 수행단과 함께 전산실 내부를 대충 한번 훑어보더니 그냥 나가버렸다. 그가 전산실로 들어와 나간 시간은 수십초에 불과했다. 안에서 근무하는 직원에 수고한다고 격려하기는 커녕 따뜻한 눈길조차 던지지 않았다. 뭘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가 올때부터 갈때까지의 공간은 한동안 휑한 찬바람만 가득했다. 찬바람은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냈다.

나중에 상사는 말했다. “장관이 오전 행사를 소화했는데, 그게 너무 늦어져 우리 사업소에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었고 뒤의 일정도 너무 촉박해 급하게 둘러볼 수 밖에 없었다”고. 아마 직원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 상사가 생각해낸 변명이었을 게다.

그날 일은 내 젊은날의 가장 기분 나쁜 경험 중 하나였다. ‘권위’와 ‘의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거북해하는 체질이됐고, 그 회사를 그만두고 새길을 찾은 것도 그날의 트라우마와 무관치 않다.

절치부심 끝에 정권교체를 이룬 문재인 대통령의 탈(脫)권위가 화제다. 대통령이 직접 인사발표와 함께 설명을 하고, 구내식당 점심 후 청와대 참모와 벤치에서 커피 한잔을 하는 장면은 소박해 보인다. 대통령이 연차휴가를 내고 영도 모친댁 방문시 경호차량 없이 버스로 이동하는 모습, 5ㆍ18 유가족과 포옹하는 모습 등에선 권위 거품빼기를 추구하는 대통령의 뜻이 느껴져 보기 좋다.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내가 ‘문재인 다시보기’에 열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각의 ‘노무현식 소통’ 집착과 인기 영합이라는 비판 시각도 존재하지만, 대통령의 탈권위의 파격적인 행보 실행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대한민국 거물 국회의원 중 하나가 거만한 모습으로 ‘캐리어 노룩패스’(No look pass)를 한 동영상이 온나라에 돌고 있는 날, 권위에 대한 재정의와 재정립은 더욱 필요해 보인다.  탈권위 문화가 굳건하게 정착됐으면 한다. 30년전에 받은 상처를 자식에겐 물려주고 싶지 않다. y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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