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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반복’으로 그려낸 시간의 흔적
극사실적 회화’ 이진용 개인전
타이프·컨티뉴엄시리즈 223점
7월 30일까지 학고재갤러리서

수도자 고행같은 막노동 작업
노자에서 불교·양자역학까지
동서양 철학 깊이있게 담아내


“붓을 잡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9시부터 저녁 7시 반까지는 막노동에 가까운 육체노동을 한다. ‘타이프(Type)시리즈’의 재료가 되는 ‘목판 활자’를 복제하기 위해서다. 400년은 족히 넘은 중국 목판 활자를 하나씩 하나씩 판에 붙여 본을 뜨고, 흙과 다른재료를 섞어 본을 채우고 굳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오랜 먼지가 쌓인 것 같은 질감을 내기 위해 석분을 일부만 씻어내고, 조각 하나 하나에 광을 낸다. 공정은 단순하나 모든 것을 손수 해야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육체적 피로는 물론 정신력 소모도 상당하다.

이어지는 30분의 휴식뒤 저녁 8시부터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고서’를 그린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양서와 바닥에 쌓인 동양 서적을 화폭에 담아낸다. 책은 수직으로 시작했지만 수평을 이루고, 수평으로 쌓였지만 수직을 이룬다. 책갈피 하나 하나를 한 호흡에 그리고 닦고를 반복하며 완성한 고서화는 인간이 걸어온 지식의 시간이 그대로 살아있다. 밤새 그림 그리다 그 앞에 쓰러져 두 세시간 새우잠을 자면서도 행복하단다. “만리장성 쌓듯 노동한다”는 화가 이진용(56)이다. 


트렁크와 고서(古書)의 극사실적 회화로 유명한 작가 이진용이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컨티뉴엄(Continuum)’이라는 주제의 전시엔 목판활자를 이용해 2014년부터 작업한 타이프 시리즈와 작가의 수집품을 활자와 동일한 방법으로 제작한 ‘컨티뉴엄(Continuum)시리즈’등 223점을 선보인다.

개막을 앞두고 28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진용 작가는 살인적 작업량을 소화하면서도 ‘괜찮다’고 했다. “남들처럼 일상적으로 생활해서는 이 작업을 할 수 없기”에 스스로를 기만한다. 밥도 하루에 한 끼, 잠도 하루 두 세 시간. 일주일을 하루처럼 산다. 늘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해 ‘작업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는 게 요지다. “피곤하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더는 못하죠. 아무런 생각없이 그 순간에만 집중합니다. 고도의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죠. 그런 호흡으로 만들어낸 작업들입니다”

수도승이나 수도사처럼 고행을 즐기며 정신적 고양을 추구한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작업, 인간이 하지 못할 것 같은 작업을 하고 싶어요. 미련하고 우둔한 선비처럼요” 


똑똑 떨어지는 미약한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 끊임없는 반복으로 작품이 탄생한다. 작가에게 시간은 흐르는게 아니라 쌓인다. ‘반복’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 되는 시간’을 통해 사물이 생성된다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작은 입자들이 모여 활자를 이루고, 그 활자들이 모여 우주를 만들어 내는 듯한 그의 작업은 일찌감치 한국 미술계 큰 손의 눈에 들었다. 2014년 상하이 학고재 전시를 보고 간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은 이듬해 그 작품을 개인적으로 소장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김순응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도 2011년부터 눈여겨 봐왔던 작가다. 김 대표는 “이진용의 작품은 노자, 장자, 불교, 양자역학까지 동서양 철학을 담아내면서 추상, 구상, 조각, 페인팅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고 평가했다. 전시는 7월 30일까지.

이한빛 기자/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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