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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라 중산간은 ‘도보여행’ 천국…뚜벅뚜벅 한걸음 ‘인생 힐링’
사려니숲길·먼물깍습지·머체왓숲·왕매…
세계적 생태 보고…현무암·기암괴석 장관
정글 지나 초원 만나면 한가로이 말 풀 뜯고
곳곳 예술인 자연친화 건축물은 모두 작품
미술관·박물관도 즐비…흑돼지 볶음은 꿀맛


‘사막 모래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 보다 다섯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마음도 건천이 된 지 오래인 날/ 쏟아진 빗줄기가 순식간에 천미천 같은 개울을 이루고, 우리도 환호작약하며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 (중략) 한라산 중산간, 신역(神域)으로 뻗어 있는 사려니 숲길 같은….’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인 시인 도종환은 ‘사려니숲길’이라는 시를 통해 제주 중산간을 인생 역전의 힐링터로 칭송했다.

비가 오고 물이 솟아나기 무섭게 지하로 다시 스며드는 현무암 지반 위에서 악착같이 살아보려는 초목의 투쟁이 마침내 공생의 조화를 이룬 곳. 키 큰 편백들이 울울창창 피톤치드를 내뿜는 가운데 언듯언듯 만나는 초원에선 건강한 말들이 걱정 소리 하나도 들리잖는 듯 한가로이 풀을 뜯고 뛰노는 곳.
 
거문오름과 알밤 오름의 충돌사건은 용암을 바다로만 흘려보내지 않았다. 제멋대로 흐르던 용암은 용천수과 빗물을 중산간에 가둬버린다. 비 오면 연못, 안오면 습지가 되는 곳이다. 사진은 거문오름 전경.

날이 좋아서, 날이 궂더라도=날이 뜨거우면 그늘을 만들어주고, 날이 적당하면 햇살을 한 몸에 받는 곳. 비라도 오면, 녹회색 채도대비의 운치에다, 건천들이 거대 하천으로 돌변해 환호작약하며 달음질 치는 그 곳, ‘중산간’은 세계에 몇 안되는 생태의 보고, 한국 생태의 성역같은 곳이다.

한라산 북동쪽 중산간인 사려니숲은 비 내리면 삼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편백, 대나무가 풍기는 향이 더욱 짙기에 ‘비가 와서 좋은 길’이라고들 한다. ‘신성한 숲’이라는 의미의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를 시작으로 물찻ㆍ사려니오름을 거친다. 비가 오면 천미천에 물이 불어 빠른 속도로 기암과 부딪치며 아우성을 친다.

제주도 중간산이 성큼 육지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중산간 동서에 각각 관광지 순환버스를 개통하고, ‘뚜벅이’ 여행자가 물 흐르듯 연결된 시내버스로 구석구석 다니게 대중교통 체계가 전면 개편됐다. 

‘비가 와서 좋은 길’ 사려니숲길

동부 순환버스를 타면 다희연을 만난다. 조천읍 선흘리 유기농 녹차다원이다. 이 일대 정글과 습지는 거문오름이 폭발하면서 알밤 오름과 부딪쳐 용암 흐름이 뒤죽박죽 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둥글게 굳어버린 것이 용암 동굴이다. 동굴카페가 들어선 이브홀은 지하에 생긴 커다란 돌구멍이다. 지상의 녹차밭과 100명에 육박하는 도공이 빚은 작품 감상실, 녹차족욕 체험장에선 현생의 시간이 흐르지만, 지하 카페의 시간은 100여만년전 신생대 4~5기에 멈춰있다.

다희연에서 두 정거장 더 가면 동백동산 습지센터이다. 기타 치는 돌하르방의 익살스런 석상을 지나 숲에 들어서면 우거진 초목에 오솔길이 그늘이고 언듯 언듯 햇살이 비춘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 지반 위에서 버텨보려고 뿌리가 근육질의 판근 모습으로 지상에 기어나오고, 태양을 향해 높게 솟구친 나무와 어떻게든 뻗어보려는 넝쿨이 기기묘묘하게 상생한다. 


세계적 생태보고 먼물깍습지
신(神)의 중산간 명품 생태 만들기=숲길을 2㎞가량 들어가면 먼물깍습지가 나타난다. 거문오름과 알밤 오름의 충돌사건은 용암을 바다로만 흘려보내지 않았다. 제멋대로 흐르던 용암은 용천수과 빗물을 중산간에 가둬버린다. 비 오면 연못, 안오면 습지가 되는 곳이다. 2011년 지구촌 모든 사람이 보호해야 할 람사르습지로 지정됐다. 긴꼬리딱새, 팔색조 등 희귀조류와 비바리뱀, 맹꽁이 등 양서,파충류, 제주에서만 발견된 제주고사리삼 등이 서식한다.

동남쪽 남원읍의 머체왓숲ㆍ서중천과 서쪽 한림읍의 금오름 분화구 역시 비가 오면 흐르거나 고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건천이거나 습지이다.

머체왓숲길 방문객지원센터에서 초원길과 수목길을 걸으면 멀리 바다가 보이고 간간이 한라산을 마주한다. 숲향기에 취해 길을 잃어도 서중천이 있기에 어렵지 않게 행로를 되찾는다.

이 숲을 관통하는 서중천은 현무암과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건천이다. 황소 만한 거친 암석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거나, 울퉁불퉁하면서도 매끈한 바위가 누워있기도 하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것을 보면 지질의 변덕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7㎞ 길이의 머체왓-서중천 산책로 곳곳엔 나무사이로 나만의 모옥(茅屋)같은 아지트도 있고, 따라 가면 왠지 신세계가 있을 것 같은 오솔길이 유혹하기도 한다. 울창한 숲을 지나 초원을 만나면, 한가로이 말 풀 뜯는 모습에서 도시의 소음을 잊는다.

노약자를 동반했다면 지원센터 서쪽 한남교차로에서 우회전한 뒤 다시 오른쪽 임도로 들어서 느리게 드라이브해도 좋겠다. 반달모양의 임도는 서중천 전망대, 숲터널을 지난다. 남쪽 중산간엔 포도호텔 등 자연친화적인 건축물도 작품이며, 생태-문화예술 박물관도 많다.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 뜯는 말
왕매가 패러글라이딩 만날 때=한라산의 서쪽 중산간의 금오름에 오르면 왕매라는 분화구가 나타난다. 근심 걱정 없는 노루들이 뛰놀다 목 축이는 곳이다. 맑은 날, 제주 하늘을 품어 푸르다. 때 마침 이곳에 패러그라이딩이 지나간다면 중산간 초원과 저 멀리 보이는 협재해변과 비양도 푸른 바다를 끼워넣어 ‘인생 사진’ 한장 찍는다. 왕복 1시간이면 오르내린다. 이곳에서 10㎞쯤 떨어진 곳에서 민박집 하는 이효리 회장이 금오름에서 신곡 ‘서울’ 뮤비를 찍었다. 요즘 대세 트와이스의 ‘시그널‘ 뮤비 배경지이기도 하다.

금오름 입구 금악리에서 제주비엔날레의 중심지, 저지리까지 3㎞ 구간은 풍력발전기 아래 말들의 뜀박질하고, 세계 최장 길이 경계담장 ‘제주 밭담’이 첩첩의 스펙트럼을 연출하며, 제주식 로컬푸드가 싱싱하게 자란다. 해발 120m 평지에 착상한 저지리 예술마을에 들어서면, 꽃과 허브향이 기분을 좋게 한다.

거리 곳곳 벽화와 조각, 공터 마다 심어진 로즈마리 허브, 작약, 붓꽃, 그림같은 예술인들의 건축물, 간간이 보이는 기와집, 꽃과 예술적 설계가 조화를 이룬 게스트하우스까지 모두 작품이다. 피렌체 처럼, 뭘 좀 아는 이곳 주민들은 문화예술인의 입촌을 우대했기에 마을이 고급지게 바뀐 것이다.

저지리 제주현대미술관은 현무암 자연석을 제주 사람들로 형상화해놓은 진입로 부터 여행자를 매료시킨다. 야외전시장, 갤러리 등이 있고 오솔길 마다 문화예술인 마을에 사는 예술가들의 개별 생활공간과 작품을 만난다.

 
제주현대미술관의 ‘제주비엔날레’
제주 비엔날레, 12월3일까지=제주현대미술관은 오는 12월3일까지 이어질 비엔날레를 계기로 ‘생태미술관’으로 거듭난다. 곶자왈의 생명 정신에 현대미술의 새 형식을 접목시키겠다는 것이다.

저지리 음식점은 마을을 조금 벗어난 보건소 사거리에 가서야 있다. 간장게장, 흑돼지 볶음을 무한리필하고 10가지 반찬을 제공하는 7000원짜리 점심뷔페를 먹으면서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다.

중산간의 매력이 제대로 빛을 발할 제주의 가을은 그렇게 풍요로웠다.

제주 중산간을 비롯한 숨겨진 명소와 한라산, 성산, 산방산, 대포 주상절리, 외돌개, 유네스코 해녀문화 등 주요관광코스, 관광지 순환버스에 대한 정보는 제주관광공사가 운영하는 비짓제주(visitjeju.net)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함영훈 여행선임기자/a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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