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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스토리] 원료의약품 마운드에 선 ‘에이스 사업가’…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
- 사내 야구 동호회의 에이스 투수인 김 대표
- “리스크 관리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경영할 것”
- “바이오ㆍ제약의 선두 그룹을 지원해줘야”

[헤럴드경제=박세환ㆍ김지헌 기자] “에스텍파마 스나이퍼스 에이스 투수입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스텍파마 서울사무소 집무실 한켠엔 야구 수상 트로피 너머로 파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와인드업 자세를 취하고 있는 김재철 대표(57) 사진이 걸려있다. ‘사내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노장 투수가 얼마나 할 수 있겠나’ 싶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안산시 사회인 리그 전체 51개팀에서 방어율 2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 경기를 치른 17개 팀 투수 가운데 방어율 1위를 기록, ‘수훈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경기도 야구소프트볼협회장도 역임 중이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야구를 하는 이유를 물으니, 그는 40여년 전 이야기를 들려줬다.

“중학교 때 야구를 즐겨했어요. 돈이 없어도 방망이, 공, 포수 마스크만 있으면 사람들과 모여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 때 제가 투수 겸 4번 타자였습니다. 8년 전 직원들이 사내 야구 한다고 했을 때, 경기 중 다칠까 싶어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바라봤죠. 그런데 막상 구경 갔더니 다들 너무 헤매더군요.(웃음) 그래서 제가 차라리 뛰는 게 낫겠다 싶어 야구를 시작했죠.”

그는 비단 야구장 마운드 뒤에서만 ‘에이스’가 아니다. 올해로 21주년을 맞은 에스텍파마를 국내 원료의약품 제조 대표 기업으로 키워낸 ‘도전과 열정(김 대표 좌우명)’의 기업가이다. 에스텍파마는 천식치료제, 자기공명영상(MRI)조영제, 알코올의존증치료제 등 원료의약품 50여 종을 생산해 국내를 비롯해 일본, 중국, 미국 등 30여 개국에 공급하고 있다. 김 대표의 추진력과 각자의 포지션에서 맡은 역할에 충실했던 구성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는 ‘도전과 열정’이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밝혔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때문에 전공하게 된 화학 = 청소년기에 김 대표는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다. 독일문학을 좋아해 문과 계열로 대학에 진학하길 원했지만, 집안이 가난했기에 취업을 고려해 이과 계열로 진학했다.

“아버님이 사업에 두 번 실패하셨어요. 그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이 힘들었죠. 문과 계열을 원래 전공하고 싶었는데 취업을 위해 이과로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취업을 위해 어느 과를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헤르만헤세의 저서 ‘데미안’이 떠오르더군요.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데미안이 화학에 열중하는 모습이 떠올라서 화학을 선택한 것입니다. 화학 실험을 하는 대학생이 됐을 때도 그 느낌을 잊지 못해 독문학 개설을 청강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찾아가는 장면을 짚어줬다. ‘데미안이 화학 실험실로 꾸며 놓은 조그만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곳에는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밝고 하얀 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취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화학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기회의 창(窓)’이었다. 화학 계열은 당시에도 취업이 잘 되는 인기 학과였다.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한 뒤 김 대표는 1983년 태평양그룹 공채에 응시해 합격했다.

“친구들이 대학원을 가거나 유학을 갈 때, 저는 바로 태평양 공채로 입사를 하게 된 것이죠. 처음에는 화장품 사업부를 염두에 두고 갔는데 저를 제약 사업부에 배치하더군요. 처음 의도와는 달랐지만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구원으로 입사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물질의 화학적 결합을 연구하는 때보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때가 더 잦았다.

“연구원으로서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는데, 그런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더군요. 몇 년이 지나니 영업하러 다니기 바빴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해는 갑니다. 병원 매출과 신제품 출시가 제약 사업에서 중요한데, 원료 연구를 하겠다고 일개 연구원이 나서니 경영진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죠.”

그러나 당시의 영업 경험이 그의 발목을 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개발이 전부는 아니더군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업 능력도 필요합니다. 영업 잘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많이 배웠는데, 저는 기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보니 어떤 지점에서 승부를 보면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지가 보이더군요.”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는 원료의약품을 국산화한 기업인이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위궤양 치료제 원료 사업으로 시작…“연구ㆍ생산은 저녁에”= 태평양제약에서 10여년을 근무한 뒤 김 대표는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창업을 한 이유를 물으니 “순전히 보람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됐었습니다. 포이동에 사무실 얻어서 개발할 아이템을 찾고 그 다음에 공장들을 방문했죠. 공장을 임대해 시작했습니다. 퇴직금 500만원과 빌린 500만원이 창업 자금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해 1996년도 제조에 첫 발을 디딘 셈입니다.”

첫 원료의약품은 녹우제약에서 의뢰받은 위궤양치료제 원료였다. 국내에서 시도하지 않아 해봤다는 게 김 대표 설명이다.

“원료의약품이 보통 유기물인데 금속 성분이 들어간 것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위궤양치료제 원료로 시도한 것도 그런 종류였어요. 그것을 성공한 덕분에 에스텍파마가 이후 금속유기화학물 관련 의약품에서 경쟁력을 쌓을 수 있었죠.”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을 만나고, 해가 지고서야 연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그는 바삐 뛰어다녔다.

“낮에는 사람 만나거나 은행을 가는데 시간을 다 썼습니다. 연구와 생산은 저녁을 먹은 뒤에야 할 수 있었죠. 처음에는 저를 포함해 7명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알고 있던 한 아주대 교수님이 있으셨는데 그 분 제자들을 데려와 시작했죠. 다들 아직 경험이 없는 신입들이었습니다.”

김 대표는 아직도 사업 초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인력도 경험도 모두 부족했기 때문이다.

“생산 일정에 차질이 빚어져 개발하기로 한 제품이 늦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처음 5~6년은 생존의 기로에서 방황한 매우 힘든 시기였죠.”

오히려 1997년 외환위기는 턱 막힌 그의 사업에 잠시나마 숨통을 틔어준 계기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어음 유통이 잘 안 돼 자금 조달에 애를 먹었죠. 그 때 직원들 설 보너스를 못 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대출도 잘 안 되니 신규 투자는 엄두도 못 냈죠. 그런데 환율이 올라 그나마 숨통이 트였습니다. 원료의약품을 수입하던 시절인데, 환율이 오르니 저희처럼 원료의약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기업이 30% 가량 가격을 인상해도 여전히 경쟁력이 있어서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었죠.”

▶“앞만 보지 말고 뒤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느꼈다” = 한 때 김 대표의 리더십은 성공을 부르는 강력한 뚝심 역할을 했다.

“2007년 화성 공장을 지을 때 주변에서 참 우려가 컸습니다. 연매출이 200억원일 때 250억원을 들여서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짓고나니 잘했다는 평가나 나왔습니다. 그 시기를 놓쳤다면 설비투자에 100억원 가량 더 들 수도 있었죠. 또 기업으로서 한 단계 레벨업할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외국에서 업계 관계자들이 와 공장을 보고선 참 잘 지었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는 시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앞만 보며 달리면 될 줄 알았던 그에게 그동안의 경영을 되돌아보게 한 사건이 터졌다.

“예전에는 제가 끌고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유럽 출장을 2주 다녀온 뒤 바로 공장으로 가 새벽까지 일을 하곤 했죠. 제가 자리를 비우면 직원들이 경험이 부족해 빈틈이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직을 끌고 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뒤에서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죠. 6년 전으로 기억합니다. 유럽 시장에 수출하던 안산공장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유럽에서 사업과 관련된 정기적인 검사가 실시되는데, 저희 시스템이 이에 대응을 못했습니다. 그 결과 허가가 취소되고 유럽 시장 진출이 중단된 적이 있죠. 너무 앞만 보고 가다보니, 뒷받침해주는 조직이 안정적으로 돌아가는지 충분히 확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기업의 자생력을 갖추는데 관심을 갖게 됐죠.”

그는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리스크 관리’도 중요시한다고 말했다. 자생을 위해 독자적인 생존만 고집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지속가능한 경영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당장 하기 매우 어렵거나 성공 가능성이 절반 수준이라면, 일단 보류를 하는 것이죠. 독자적인 도전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와의 협력과 네트워크를 강화하려고 합니다. 각자의 강점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할 수 있습니다. 벤처 투자도 하고 중국이나 인도 등지의 파트너와 협력을 강화해 기업의 경쟁력을 키울 것입니다.”

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는 바이오ㆍ제약산업 선두 기업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

▶“바이오ㆍ제약 산업의 ‘선두기업’을 키워주는 정부 정책 있어야”= 김 대표는 국내 바이오ㆍ제약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국가 정책 차원의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벌어들인 자금은 경제 활성화에 다시 투자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바이오ㆍ제약 산업은 국가 정책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난 2005년 황우석 박사 논문 조작 사건 때문에 당시 타오르던 바이오 산업 붐이 가라앉았죠. 생각해보면 당시 붐은 과도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이오 붐을 다시 만드는데 개별 기업이 나서서 해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환경적 제약이 크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독일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인사는 폴크스바겐을 살리기 위해 독일 정부에서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었다고 하더군요. 폴크스바겐이 가진 국민기업으로서의 가치 때문이겠죠. 우리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선도하는 리더 기업을 선정하고 그 기업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대기업’을 키운다기보다 ‘경쟁력있는 기업’을 키우는 데 방점을 둬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령화 사회로의 전환에 전략적으로 대비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내비쳤다. 국내 바이오ㆍ제약 산업의 발전을 위해 취약한 원가구조를 개선하는 것 역시 그가 강조한 대목이다.

“국내 원료의약품 제조공장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건비 등으로 인해 원가 구조가 취약하죠. 그리고 신약개발 수준도 아직 부족합니다. 신약을 개발해서 그것을 세계 시장에 마케팅하면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시장은 마케팅에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일본도 세계시장으로 나아가는데 20~30년이 걸렸다는 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고령화는 더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 바이오와 제약은 그 중요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문가들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독일 출장에 막 돌아와 시차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그에게 건강 유지 비결을 물으니, 한치의 망설임 없이 ‘수영’이라는 답변이 나왔다.

“창업한 이후 스트레스 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해외에서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골격근과 호흡기에도 좋죠. 체력이 좋아지면 정신력도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직원들이 수영 강습 받는 경우 100% 지원합니다. 사내 대회도 격년으로 열 정도로 수영을 통한 체력 단련에 신경쓰고 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뒤 20년 넘게 수영을 하며 전력으로 뛰어다녔다는 김 대표. 강한 눈매와 집무실 책상 위에 쌓인 낡고 오래된 여권 더미가 그가 에스텍파마를 위해 발로 뛴 세월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ra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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