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우암 송시열과 인성교육포럼
[헤럴드경제=서병기 선임기자]우암 송시열은 국사 교과서에 조선 후기 대유학자로 효종때 북벌운동에서 잠깐 언급된다. 17세기를 산 우암을 조금 더 파고들면 조선시대 당쟁의 지형도가 그려져 조선 후기 사회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암은 조광조와 이이, 김장생의 학풍을 계승하고 영남학파 이황을 배격한 기호학파의 주류 주자학자다. 우리나라 학자중 ‘자’(宋子)자가 붙는 유일한 인물이며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이나 나온다. 그런데도 우암은 기호학파가 영남학파에 비해 조명이 덜 된 탓인지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다. 


그가 쓴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도 완역이 돼있지 않다. 우암은 부정과 긍정 양 극단적 평가가 존재한다. 조선을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려는 개혁가고 실천가이자 사색당쟁의 주역이다. 주자학을 신봉한 원칙론자여서 고집도 많아 주변 사람들과 자주 싸웠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로 정리할 사람이 아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척화론을 주장한 서인인 청음 김상헌이 우암의 스승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후 청의 심양에 있다 돌아왔지만 인조가 노(老)정치가를 부담스러워 하자 한양으로 오지 않고 양주의 석실에 머물렀다. 우암은 무작성 양주로 찾아가 결국 김상헌을 스승으로 삼았다. 뛰어난 멘토를 찾아낸 것이다.

우암은 노론의 영수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지게 된 것도 우암이 역할을 했다. 그러니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게 개인이 아닌 시스템으로 본다면 우암을 공부해야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송시열의 사상은 조선 말기 위정척사론으로까지 연결된다.

우암은 단종복위를 꾀한 사육신중 한명인 박팽년 유허비의 비문을 지어 그의 명예회복을 도운 사람이다. 당시 이 의견을 잘못 내세우다가는 삼족이 멸할 수 있는 반역자가 될 수도 있지만, 우암은 자신의 제자였던 효종에게 박팽년 신원(伸冤)의 운을 띄웠다가 현종때 관철시켰다.

이중환은 택리지 서문을 우암이 지은 강경의 집에서 썼다. 남인이 서인 집에서 집필활동을 했다고 보면 우암이 단순히 사색당쟁을 야기한 부정적 인물로만 볼 수 없다.

본관이 은진인 우암은 옥천에서 태어나 주로 대전(회덕)에 거주했다. 한류스타 송중기가 그의 후손인 은진 송씨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지금도 대전에서 살고 있다.

우암은 장희빈 아들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83세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28일 우암 탄생 410주년을 맞아 그가 후학을 길러냈던 대전 우암사적공원내 남간정사에서 우암인성교육포럼이 열렸다.

우암의 사상속에는 인성을 논해볼 거리들이 많다. 사대주의자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지만, 글로벌 리더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된다. 우암이 강조한 공자의 도(道)와 직(直), 특히 익명의 자리에서도 삼가하고 조심하며 사욕이 없는 청명정대(淸明正大) 상태는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공자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단순히 ‘옛 것을 익히어 새것을 안다’로 해석하지 않고, 자신과 관계됐던 것, 경험을 다시 파악해보면 앎이 새로워진다고 했다. 온고의 고 자가 옛 고(古)가 아니었다. 우암이 말하는 '인색'(吝嗇)이라는 단어도 짠돌이 개념이 아니다.

제 22회 우암문화제의 일환으로 열린 우암인성교육포럼은 우암문화제추진위원회, 대전동구문화원, 남간사유회, 대전광역시, 대전동구청, 대전광역시교육청, TJB대전방송 등이 주최, 주관, 후원을 맡았다. 

곽신환 숭실대 철학과 교수의 '우암의 학문에 나타난 인성교육', 김문준 건양대 인문융합교육학부 교수의 '우암의 춘추정신과 평화사상', 한기범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우암의 선비적 삶과 정신' 등의 발제가 있었다. 우암의 사상과 식견을 되새겨보면서 오늘의 지혜를 뽑아낼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wp@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