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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변호사 출신’ 대법관의 6년
미국에서는 대법관을 ‘저스티스(Justice)’라고 부른다. 미 연방대법원은 구체적인 사건보다 사회의 거시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15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예가 대표적이다. 그들이 내리는 판결은 곧 ‘정의’로 받아들여진다. 대법관은 종신직으로,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의회나 행정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큰 권한을 갖지만 임기 제한이 없어 대법관 한 명이 바뀌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매우 큰 주목을 받는다. 누가 후보군으로 검토되는지, 그들이 평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보도되고, 예전에 작성한 논문이나 칼럼도 낱낱이 검증 대상에 오른다. 우리나라는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이 미국의 ‘저스티스’ 역할을 맡지만, 임명 과정에 대한 관심은 놀라울 정도로 적다.

6년 전,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은 여성변호사회 회장 박보영 변호사를 대법관으로 파격 발탁했다. 젊은 나이, 여성, 변호사단체 회장, 한양대 출신인 박 변호사는 ‘대법원 다양화’ 조건을 모두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다. 대구·경북(TK) 출신 인사가 중용되던 이명박 정부에서, 전남 순천 출신이라는 점은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됐다. 사실 당시 양 대법원장의 선택은 다른 대법관 인선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많았다. 양 대법원장은 박 대법관과 함께 김용덕 법원행정처 차장을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이후 고영한, 김창석, 김신, 조희대, 권순일, 이기택 대법관까지 서열순으로 법원장급 인사를 대법관에 앉히는 인사를 이어갔다. 박 대법관 카드를 일종의 ‘지렛대’로 활용했는지는 지명권자 본인만 아는 것이겠지만, 나머지 인선을 수월하게 만드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과 관계없이 박 대법관의 인사청문회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청문위원들 중 아무도 이런 조건을 가진 후보자를 모질게 대하지 못했다. 한 여성 위원은 “도대체 이런 청문회가 어딨냐”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박 대법관은 6년 동안 ‘다양화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특히 노동 사건에서 많은 지적을 받았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낸 해고 무효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깬 사례가 대표적이다. KT가 노조활동을 한 사무직 근로자를 기술직으로 전보한 게 부동노동행위가 아니라고 본 판결도 있다. 이 사건은 대법원이 이미 회사의 인사권 남용을 인정해 손해배상 책임까지 지웠는데도, 박 대법관이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야쿠르트 아줌마’는 근로자가 아니라서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고 본 판결도 박 대법관이 주심이었다. 그는 대법관 전원이 심리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소수의견을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유독 박보영 대법관에게 ‘왜 제 역할을 못했느냐’고 비판을 집중하는 것은 가혹한 면이 있다. 자격을 따지자면 박 대법관보다 더한 흠을 가진 이들도 있다. 일선 판사들에게 정치적 사건에 대한 처리 지침을 내려 논란이 된 신영철 대법관도 임기를 채우고 퇴임했고,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했다는 의혹을 받은 당시 수사 검사 출신 박상옥 대법관도 현재 재직 중이다. 박보영 대법관도 대법원장의 지명에 따라 그 자리에 앉았고, 본인의 양심에 따라 판결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박보영 대법관 인선을 집어 ‘실패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양화 요건’이 지명의 명분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모든 외형적 조건을 갖췄던 박 대법관이 ‘소수자 보호’라는 소명을 완수하지 못한 점은 우리 사회가 ‘저스티스’를 선별하는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박 대법관이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제대로 물은 이는 없었다.

박 대법관은 지난달 29일 퇴임식에서 “제 능력의 한계로 사안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여 상처를 드린 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정중하게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가 주심을 맡았던 쌍용차 해고 사건 노동자와 가족 중 25명은 이미 자살이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박 대법관에게 ‘왜 이렇게 판결했느냐’ 따지는 것은 지엽적이고 소모적이다. 그보다 ‘왜 우리는 변호사 박보영을 대법관에 앉혔나’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우리가 성의없이 골랐을 뿐이다. /jyg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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