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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PAS]전재산 바쳐 안중근 돌본 ‘잊혀진 카네기’ 최재형

[헤럴드경제TAPAS=윤현종 기자] 
“…우리가 살던 연해주 대저택에 어느때인가 안응칠(안중근)이 살았다. 그는 거사를 준비했다. 벽에 사람 3명을 그려놓고 사격 연습을 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하얼빈으로 떠났다…” (최 올가 페트로브나의 자서전 발췌)

최재형 선생을 다룬 러시아어판 책 표지(왼쪽)와 그의 다섯째 딸 올가(가운데 성인 여성)

올가는 다섯 째 딸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준비하던 ‘응칠 아저씨’를 기억한다. 올가의 아버지는 러시아 국적 한인이었다. 한 번에 최소 수백억 원을 움직인 자수성가 부호였다. 전 재산은 독립을 위해 바쳤다. 러시아 한인의 항일운동은 모두 그의 손에서 시작했다. 안중근의 ‘모든 것’을 책임진 것도 그였다. 사형 후 남겨진 안중근 가족까지 돌봤다. 정작 자신이 죽은 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교과서엔 한 줄도 실리지 못한 잊혀진 의인. 4월 7일, 순국 98주기를 맞은 최재형(1860(또는 1858)∼1920) 선생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최재형 선생의 사진(왼쪽)과 그가 큰 돈을 벌어 유치한 블라디보스톡 시내의 건물. 지금도 남아있다. [사진=최재형기념사업회]

   8월15일 출생 “어마어마한 인물…카네기 같은 사람”

도올 김용옥 교수는 지난 2011년 한 강연서 “안중근 의거 뒤에 어마어마한 인물이 있었다”며 “진짜 카네기같은 사람”이라고 최재형을 평했다.
그는 함경남도 노비 집안서 태어났다. 출생일은 공교롭게도 8월 15일. 대기근을 피해 어릴적 두만강을 건넜다. 연해주 정착 뒤 가출, 장삿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았다. 이 때 배운 러시아어로 연해주 한인 노동자들을 돕다가 러시아 군납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엄청난 부(富)를 모았다. 거느린 기업만 4개였다. 업종은 농업ㆍ축산ㆍ건축 등 다양했다.
재산이 얼마였을까. 정확한 집계는 어렵다. 최재형기념사업회 자료에 따라 사업소득과 개인소득ㆍ독립 후원금을 합쳐봤다.
113만 5000루블. 러시아 각지에 있던 그의 저택들 값은 뺀 돈이다. 지금 가치로 1년에 136억여 원.
최재형은 이 돈을 모두 바쳐 연해주 한인을 지원했고, 독립운동에 썼다.
한인 학교 32개를 세웠다. 월급으론 유학생을 도왔다. 망해가는 조선을 떠나 연해주에 온 항일 인사들은 최재형 집에서 같이 살았다. 안중근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안중근 의사 [사진=최재형기념사업회]

   안중근의 ‘모든 것’을 돌보다 

안중근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했다. 최재형은 이 즈음 의병을 모아 ‘동의회’를 만들었다. 최초로 조직화 한 러시아 항일투쟁단체였다. 
조직 결의는 1908년 4월. 최재형은 이 때 수억 원을 쾌척했고 의병 수백 명에게 자기 집을 내줬다. 안중근은 동의회 평의원이자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활동한다.
최재형은 항일 운동에 언론을 적극 활용했다. 1909년 ‘대동공보’라는 한인 신문사를 인수한 이유다. 안중근은 대동공보 기자증을 들고 정보를 수집했다. 1909년 2월엔 동의회 동지들과 혈서 ‘대한독립’을 쓰고 단지(斷指ㆍ손가락을 자름)동맹을 맺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이 구체화 하던 시점이다.
이처럼 최재형은 안중근의 연해주ㆍ만주 활동 모두를 지원했다. 의거 직후 체포된 뒤엔 러시아ㆍ영국ㆍ조선 출신 변호사 3명을 붙여 구명활동도 했다. 안중근 사망 뒤 남겨진 가족을 끝까지 돌본 것도 최재형이었다. 딸 올가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 …안응칠은 하얼빈서 일본군 책임자를 살해했고, 거사 후 현장서 체포됐다. 그의 아이 2명과 아내가 남았다. 그들은 종종 우리집을 왕래했다. 엄마는 안응칠 식구들을 잘 대접하려 노력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남아있는 최재형 선생의 집 [사진=독립기념관]

   사망 후 가족은 강제이주, 무덤도 못찾아

안중근 사망 후 일본 압박으로 최재형의 입지는 좁아졌다. 하지만 1911년 독립후원단체 권업회를 세워 항일운동을 지속한다. 1919년엔 상하이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 4월 5일. 그는 일본군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혔다. 재판 없이 이틀만에 총살 당했다.
당시 상황은 정확치 않다. 최재형기념사업회 문영숙 상임이사는 “최재형이 감옥을 옮기던 중 총살 당했다는 게 일본측 기록”이라며 “그냥 끌고가다 쏴 죽였다는 딸들의 진술과 배치된다”고 설명했다.
묘소는 찾을 수 없다. 일본이 가족에도 장지 위치를 알리지 않아 매장지는 유실된 상태라고 문 이사는 말했다.
이후 1937년, 최재형 가족도 소련 정권에 강제이주 당해 뿔뿔이 흩어졌다. 자녀 1명은 키르기스스탄 지역으로, 1명은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식이었다.

2018년 초 겨우 찾아낸 최재형 선생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묘소.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 공동묘지에 있다 [사진=최재형기념사업회]

   교과서엔 한 줄도 없다

독립운동에 인생 모든 걸 쏟았지만, ‘최재형’이란 이름은 한국인에게 아직 생소하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는 없다.
1952년 사망한 최재형의 부인 최 엘레나도 완전히 잊혀진 상태. 남편 뿐 아니라 항일의병, 그리고 남겨진 안중근 가족까지 돌봤던 그는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묘소 위치는 올해 초에 비로소 확인됐다.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할까. 
문 이사는 “공훈기록이 남지 않아 ‘최재형 가족’이란 기록만 갖고는 안장이 안 된다는 국가보훈처의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4월 6일 열린 최재형 순국 98주기추모행사. 국가보훈처는 올해부터 지원한다. [사진=최재형기념사업회]
 
   “정부가 더 관심 기울였으면…”

정부는 1962년 최재형을 안중근 등과 함께 유공자로 서훈했지만 ‘대우’는 그에 못 미쳤다. 러시아(구 소련) 국적이었기 때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묘소 대신 위패를 국립묘지에 모신 것도 2015년이 돼서다. 국가보훈처는 올해부터 순국추모행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올 가을엔 그의 고택이 있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최재형 기념관’이 문을 연다.
문 이사는 “정말 많은 일을 하신 분인데 남은 사료가 많이 없어 안타깝다”며 “국가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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