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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민족은 단일민족?…민족기원 ‘단군무리’도 한반도 이주민이었다
“예조에서 보고하기를, ”회교도는 의관이 우리와 달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백성이 아니라고 해서 혼인하기를 꺼립니다. 이미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들이니 마땅히 우리나라 의복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때 회회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세종실록’ 세종 9년 4월4일의 글이다. 아랍계 무슬림이 조선에 귀화해 그들 풍속대로 생활하고 국왕의 주최행사 때에도 그들의 의식대로 하례했다는 내용이다. ‘태종실록’에는 조선 거주 외국인 관리가 상당히 많아 재정난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지적한 내용도 있다.


이희근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전문위원은 ‘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따비)에서 이는 여진족, 왜인, 회교도 등이 당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는 사료를 근거로 우리 민족이 고조선 때부터 단일 민족을 형성했다는 통념을 반박한다.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끊임없이 유입될 수 밖에 없는 한반도에는 그 이전부터 다양한 인종이 끊임없이 유입됐으며 그 역사는 고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첫번째 유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 무리다. 단군 무리가 평양 일대로 이주해 오기 전, 그곳에는 곰과 호랑이를 신으로 모시는 족속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은 말갈족으로 불리는 예맥족이라는 것. 우리 민족의 기원이라는 단군 무리부터 한반도로 유입된 이주민이란 얘기다.

이는 문헌상으로 확인 가능하다. 중국 진시황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수만 명의 중국인이 고조선 지역으로 피난해왔다는 게 ‘후한서’에 전한다.

또 진나라 말기 중국 전체가 반란에 휩싸이자 진인 수만 명이 고조선 일대로 밀려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중국계 이주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게 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은 한 무제의 침략 당시 5만 명에 달하는 한나라 원정군에 맞서 1년동안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패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다. 이들 중국계 이주민은 도망자 신세가 돼 영남 일대에 정착, 진한과 변한 24개국을 세우게 된다.

부여족이 오늘날의 길림시 일대로 망명해 오면서 이 지역의 옛주인인 예맥족의 일부가 남하해 압록강 유역으로 이주, 고구려를 세우고, 주도권을 상실한 일파가 한강 유역으로 와서 백제를 세움으로써 예맥족, 고조선인, 한인, 중국계 이주민, 왜인 등이 고대 한반도의 인구지형을 형성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단군의 후손이라는 인식은 언제 등장했을까? ‘단군의 자손’이라는 표현이 기록상 확인되는 해는 1908년 무렵이다. 저자는 갑오개혁 등으로 민족이 국가의 중심개념으로 부상하면서 “민족의식을 각성시키고 구성원을 결속시키는 상징이 필요했는데,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공유된 존재가 바로 기자와 단군이었다”며, 이 중 중국 출신인 기자는 배제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고대사 논쟁거리인 임나일본부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당시 세력이 막강했던 한반도의 왜는 금관가야를 지배할 정도였지만 452년 무렵, 금관가야에 의해 진압되고 금관국은 이들을 통제할 기구로, 간접적 통제 기구인 ‘일본부’를 두었다는 주장이다. 한중일 역사학계에서 논쟁적인 사안들로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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