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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부터 규방 처자까지…18세기 서울은 소설에 푹 빠졌었네
학자들은 18세기 가장 국제적인 도시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꼽는다. ‘유럽의 경제 수도’역할을 한 암스테르담은 세계 각지의 물산이 모이고 팔려나가면서 세계적 수준의 부유한 상인층이 형성됐다. 사무실과 창고, 생활공간을 가진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의 대저택들은 당시 암스테르담의 부를 보여주는 독특한 공간이다.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문화가 가장 먼저 꽃을 피운 이 곳에는 유럽의 빈자와 부자들이 몰려들었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빈자들은 극심한 노동에 내몰렸다. 프린센흐라흐트의 대저택의 이면에는 빈민사역장 라습하위스가 있다. 직업없이 떠돌거나 가벼운 위반행위를 한 빈민들을 수용한 이곳에서, 빈민들은 먹여주는 댓가로 하루종일 염료에 쓸 브라질나무 대패질을 했다. 일거에 부를 거머쥐려는 사행성과 투기도 판을 쳤다, 튤립광기는 인간과 도시의 탐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인문학자 25명이 18세기 세계 각지의 도시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한 ‘18세기 도시’(문학동네)를 펴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 베를린, 파리, 빈, 에든버러, 제네바, 나폴리 등 유럽과 보스턴 뉴욕 및 북경, 도쿄, 자카르타, 서울 등 22곳의 세계의 도시를 망라했다.

저자들이 18세기에 주목한 건, 산업혁명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인구가 급증하면서 도시가 팽창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즉 현대판 도시의 모습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의 가난을 이야기할 때 나폴리의 ‘라차로니’도 빼놓을 수 없다, 나폴리에서 가장 낮은 계층의 야만적인 민중집단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변변한 직업 없이 길과 광장을 거처로 삼아 살아갔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던 나폴리에 라차로니는 5만~6만에 이르렀다.

베를린은 난민과 이방인들에게 관용적인 도시로 불린다. 1685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루이 15세 휘하의 프랑스에서 박해받던 신교도들을 특별 우대했다. 칼뱅파 신교도인 위그노파들에게 브란덴부르크로 오면 특별대우 하겠다는 칙령을 발표하고 처음 도착한 난민들을 친히 나가 환영했다. 당시 1만6000명이 넘은 위그노파가 건너와 6000명 이상이 베를린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베를린 전체 시민의 6분의1에 해당한다. 이들은 대부분 염색이나 섬유분야 종사자들로 베를린은 일약 유럽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18세기에는 문화와 예술, 축제가 번창했다.

영국 남서쪽에 자리잡은 바스는 스파도시로 유명했다. 로마인들이 사랑했던 이 도시는 그들이 떠난 후 조그만 지방도시에 머물다 18세기 들어 영국 부유층이 가장 선호하는 사교의 도시로 거듭난다. 온천수를 마시는 치료법이 유행하면서 앤 여왕 을 비롯, 귀족, 부유층이 건강과 휴식을 위해 몰려들었다. 또 도로사정이 좋아지고 마차가 좀더 안락해지면서 관광이라는 근대적인 여가활동이 정착되는데, 바스는 이런 새로운 수요에 부응한 핫한 도시가 된다.

베네치아는 ‘그랜드 투’어라 불리는 견문 넓히기 여행의 주요종착지이자 유럽 제일의 도박장이었다. 에딘버러는 18세기부터 학문과 문화의 중심, 본격적으로 성장한 출판산업의 중심지였다.

같은 시기, 서울은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규방 처자들은 물론 임금과 비빈까지 소설에 재미를 붙여 책을 빌려주는 산업이 발달했다.

권력의 상징이 된 베르사이유궁, 종교개혁과 시계 제조업의 도시 제네바, 미국의 탄생과 함께 해온 뉴욕 등 역사상 뜨거운 변혁의 시기 중 하나인 18세기 세계 도시들의 모습을 한 눈에 유람할 수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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