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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권력의 ‘교만’, 견제의 ‘방자’를 경계한다

  • 기사입력 2018-09-0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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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는 정비 자식인 ‘대군’이 아닌 조선의 첫 임금이다. 정통성에 ‘약점’을 가진 데다 즉위 이후에도 선대 왕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야 했다. 선조는 조정을 장악하던 훈구파에 맞서 사림을 중용해 권력을 되찾는다. 권력을 잡은 사림은 선조 8년인 1575년 관원 선발권을 가진 이조전랑 직을 두고 기성사림인 서인과 신진사림인 동인으로 나뉜다.

선조 22년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서인이 동인을 누른다. 하지만 서인 정철이 광해군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실각, 동인이 득세한다. 동인은 급진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뉜다. 동서 붕당은 나라를 ‘절단’낸다. 1590년 통신사의 일본 방문 결과에 대한 해석도 당파에 따라 갈린다. 결국 전쟁이 없을 것이란 동인의 주장이 관철된다.

임진왜란 후에도 붕당은 더 심해졌다. 광해군을 옹립한 북인은 서인과 남인이 이끈 인조반정으로 축출된다. 선조, 광해군, 인조 등 ‘정통성’에 문제를 가진 왕 아래서 붕당들은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등 ‘대군’ 출신의 왕 때에는 붕당이 조금 주춤한다. 숙종 때는 환국(換局) 정치로 붕당을 ‘통제’할 정도가 됐다.

경종이 일찍 세상을 뜨고 또 ‘대군’이 아니었던 영조(英祖)가 등극하며 붕당이 다시 격해진다. 서인은 남인을 누른 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은 얼마나 두 세력이 치열했는 지를 보여주는 반증일 수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 때는 정쟁이 더 격해진다. 여당은 시파(時派)였지만, 야당인 벽파(僻派)의 힘도 국왕의 친부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다.

정조의 뒤를 이은 건 또다시 적장자가 아닌 순조(純祖)였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수렴청정에서 천주교 박해와 함께 시파가 숙청된다. 하지만 벽파 역시 정순왕후의 실각으로 1803년 인동 김씨에게 정권을 내준다. ‘3조, 3종, 3조’(경종 제외) 간의 붕당이 끝나고 ‘독재’인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붕당정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핵심 쟁점들을 살펴보면 결국 ‘후계’와 ‘정통성’ 문제다. 민생은 빌미인 때가 많았다. 국정책임자의 리더십이 우유부단하거나 도전받을 때 붕당이 극단이 이르렀다. 가장 치명적인 순간은 문제는 국가의 명운이 달린 결정에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붕당의 대응을 보면 치명적이다.

최근 경제 이슈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경제란 관점의 문제라지만, 해석의 차이가 정쟁의 진영과 비교적 일치한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상황에서 정파적 판단은 위험하다.

최근 우리의 경제상황은 절체절명이다. 문제의 상당부분은 이전 정부부터 이어져 온 게 맞다. 하지만 해결책임은 현 정부 몫이다. 그러자도 정권 잡은 게 아닌가. 지금 청와대에는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한 강한 리더십을 갖추는 것과 함께, 진영논리에 흔들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야당도 나라의 어려움을 틈타 스스로의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지는 말아야 한다.

편작(扁鵲)은 불치병 가운데 으뜸으로 교만방자해 사리를 논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정권을 가지면 교만(驕慢)하기 쉽고, 견제를 하는 쪽은 방자(放恣)하기 십상이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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