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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한결의 콘텐츠 저장소] 거짓과 허상의 대저택 흰개미떼의 습격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는데…
‘사막 속의 흰개미’ 공연장면 [제공=세종문화회관]
블랙박스 형태의 실험적인 공간인 ‘세종 S씨어터’의 개관과 함께, 지난 11월 9일 부터 25일까지 개관기념 공연작 ‘사막 속의 흰개미’가 공연됐다. 이 연극은 ‘2018 서울시극단 정기공연 창작대본 공모’를 통해 선정작으로, 작가 황정은의 창작극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층 객석을 막고 런웨이 형태로 구성한무대 공간의 실험적 연출, 밀도 있고 정교한 시나리오가 돋보였다. 극엔 다양한 상징과 의미들이 많아 곱씹을수록 즐거움도 커진다.

극은 흰개미 떼의 서식지가 된 오래된 한 고택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고택의 주인은 큰 교회의 젊은 목사 공석필이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고택과 큰 교회는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의 아버지에게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흰개미 출몰 신고로 나선 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에밀리아, 노윤재, 서재현)의 조사와 함께 공석필은 고택의 비밀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러던 중 그의 죽은 아버지(공태식)에게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임지한이 찾아오면서 과거 고택의 비밀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극에서 흰개미의 존재는 흙 속에서 들리는 어마어마한 흰개미 떼의 소리로 전달된다. 목재가 주식이라는 흰개미 떼로 인해 붕괴의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는 고택, 흰개미의 상징을 통해 오랜 시간 감춰왔던 그 집안 아버지들의 악행과 비밀들이 고택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임을 암시한다.

흰개미 떼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은 극에서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학계에서 흰개미들이 만든다고 추정하는 ‘페어리 서클(Fairy circle)’. 이 동그란 패턴이 고택의 마당에서 발견된다. 흰개미 존재의 근거이자 패턴화 되어 나타나는 인간의 특정한 믿음, 그리고 굴레처럼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고택과 가업을 지키기 위해 과거 수많은 아버지들이 행했던 악행들은 곧 우리사회의 비밀스럽고 부패한 어두운 단면을 투영한다. 그리고 그 악행은 페어리 서클처럼 돌고 돌아 결국 자신들을 향하게 되고 대대로 지켜온 가업은 위험에 처한다. 어두운 고택의 풍경 속에 흰개미의 존재를 암시하는 현상들은 그 속의 다양한 의미들을 드러내면서 극은 지속적으로 불안정함을 조성했다.

공석필은 아버지와 관련된 과거의 기억과 억압 속에서 괴로워하고, 아버지의 모습을 거부하면서도 이미 세습되어진 듯 스스로도 그의 아버지들과 같아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패턴화 된 또 다른 페어리 서클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동안 침묵으로 방관해 온 그의 어머니(윤현숙)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회상한다. “사람들이 이 집을 아낀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 집은 적이 많아, 그래서 담을 높이 지은거야,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말을 아끼고 또 아껴라 이 집은 비밀이 많으니까” 믿음에서 시작된 모든 것이 모두 허위이며 거짓임을 알게 되지만 침묵으로 봉쇄해왔음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높은 담에 가려져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 같던 고택의 비밀은 흰개미떼에 의해 모두 드러난다. 소름끼치는 흰개미 떼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실이 드러나며 고택은 붕괴된다. “우리는 뭘 믿고 살아온 걸까, 뭘 믿고 사는 걸까, 우리는 우리가 뭐라고 믿는 걸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종종 어떤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막 속의 흰개미’에서는 나를 지탱해 왔던 것이 결국 나를 조금씩 몰락시키고 있었다는 역설을 통해 깨달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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