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평생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못한 군주”…세종을 벤치마킹한 정조

즉위 3년째인 1779년 8월, 정조는 황금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도성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200리밖 여주, 8일 일정이었다. 오랜 고심끝에 내린 이 여정은 표면상으론 효종의 능인 영릉을 찾아 서거 120주년을 기리는 것이었지만 속뜻은 세종의 영릉에 참배하는 것이었다. 세종의 능을 찾은 정조는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고 “세종의 정치를 이어받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천명했다. 세종의 문화정치 전통을 이어받겠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정조는 들끓는 역모와 추국의 불안한 정국을 빨리마무리하고 싶었다. 이 의식은 재위 중에 단 한 명도 역모 등의 정치적인 이유로 죽이지 않은 세종처럼 정치 보복을 일절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선언이었다.

정조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될 때마다 조명받곤 하는 군주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지도자로서, 인재를 고루 등용한 탕평군주, 규장각과 장용영이라는 문무 지지세력을 키워 입지를 강화한 전략가로서 시대에 따라 정조는 다양하게 해석돼 왔다. ‘정조 연구가’로 잘 알려진 지은이는 이번 ‘정조 평전’(민음사)을 통해 개혁군주 정조의 리더십의 특징과 한계를 짚어내는 한편 인간 정조의 모습에 주목한다.

정조는 현대적 의미의 지식경영, 인재경영에 주안점을 뒀다. 씽크탱크격인 규장각을 통해 국내외의 지식을 모으고 젊은 문신들을 재교육해 국가 인재로 양성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당화시키고 사조직화의 우려와 신하를 가르쳐든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가르치려는’태도로 인해 활발한 토론 개진이 이뤄지지 않은 점은 당시 국내외적 변화의 소용돌이에 비춰볼 때 아쉬운 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까지 드러난 적 없는 정조의 미적감각과 디자인 경영 능력을 주의깊게 살핀 점은 돋보인다. 수원화성을 지으면서 성을 아름답게 짓는 게 적을 방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 정조의 미적감각은 ‘홍재전서’에도 드러난다. 정조는 역사를 기술하는 걸 그림 그리기에 비유하며 ‘세 가닥 수염’에 온 정신을 담아내듯 역사기술도 디테일 속에 본질을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은이는 정조의 생애를 ‘평생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으로 한 줄 요약했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그늘에서 늘 눈치를 봐야 했고, 복잡한 속내를 지닌 신하들과 밀당하며 개혁을 추진해야 했던, 한 시도 편할 날이 없던 군주였다는 평가다. 

이윤미 기자/meelee@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