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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에 묻는다…‘위안부 증언은 진실’이 아니라고?
런던법정 ‘홀로코스트 명예훼손 사건’
9명의 증인이 쏟아낸 증언 기록 인정
문서중심 실증주의의 패배 대표 사례

‘실존의 회색지대’ 민족주의적 왜곡 탈피
인간적 권리에 맞춘 역사인식 ‘제3의 시각’
 

“아우슈비츠 폭동을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긋나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이 재현의 역설은 증언과 문서 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기억전쟁’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역사학의 방법론으로 보면, 문서 중심 실증주의를 둘러싼 논쟁이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적이었다는 근거도, 국가가 주도해 제도적·체계적으로 시행했다는 근거도 없다며, 합법적·자발적 성매매라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무시하는 몰역사적 주장이다.

‘기억연구가’를 자처하는 역사학자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기억전쟁’(휴머니스트)에서 아주 유사한 사례를 든다. 바로 전세계적인 역사학자들이 동원된 2000년 1월11일 런던 법정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 명예훼손 사건’이다. 발단은 영국의 재야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이 미국의 역사학자 데버라 에스터 립스탯 교수와 그녀의 저서 ‘홀로코스트 부정하기’를 출판한 펭귄출판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립스탯은 책에서 어빙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규정했다. 어빙의 핵심적인 논지는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므로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자신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는 것이었다. 립스탯과 펭귄출판사 진영은 독일 군사 전문가 리처드 에번스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필두로 각 분야의 전문가로 변호팀을 구성, 어빙이 어떻게 자료를 왜곡하고, 그걸 숨기기 위해 어떤 술수를 썼는지 파헤쳤다.

어빙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명령했다는 공식 문서를 찾지 못하는 한 히틀러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폈지만, 판사는 9명의 증인이 쏟아낸 생생한 증언 기록과 역사자료를 토대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있었고 이것들이 상당한 규모로 가동되어 수십만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며, 어빙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의도에 따라 역사적 증거물을 왜곡하고 조작했다고 결론내렸다.

어빙의 문서중심적 실증주의의 패배인 셈이다. 이는 일본의 위안부 논리와 최근 전두환의 광주학살 군대 관여 등의 문제와 겹쳐진다.


저자는 문서와 기록이 중심이 된 공식 기억보다 개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적인 기억에 주목한다. 그동안 개인의 증언은 과장되고 감정적이며 부정확해 실증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곤 했다. 최근엔 개인의 이런 심리적인 기억 혼란이 진정성을 뒷받침한다는 쪽으로 기우는 추세다.

저자는 책에서 홀로코스트와 난징대학살, 일본군위안부 등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기억전쟁’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가해자가 어떻게 희생자로 둔갑하는지, 민족주의는 어떻게 공범자를 희생자로 만드는지, 전사자 숭배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선량한 학살자란 가능한 것인지, 국적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것은 정당한지 등 불편한 질문들을 이어간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실존의 회색지대’다. 조작이나 거짓은 아니지만 왜곡된 시각으로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저자는 국가와 법이 앞장서 한쪽을 편들거나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등의 작업에도 우려를 나타낸다.

한 예로, 2006년 11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조선인 전범자가 피해자로 둔갑한 일이 있다. 신고 접수된 조선인 B·C급 전범, 86명 가운데 83명이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행위에 다른 피해자로 위원회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전범으로 몰려 처벌받은 조선인 군무원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기억하려는 한국사회 공식 기억의 논리는 자기 방어적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는 또한 일본의 신사참배의 배경에 기억정치가 있음을 지적한다. 요시다 유타카의 ‘일본군병사’(2017)의 연구에 따르면, 태평양전쟁기간 300만명이 채 안되는 일본군 전사자 중 180만명이 굶어죽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고립된 병사들을 헌신짝처럼 버렸고, 굶주린 장병들은 일부 부하병사를 탈영병으로 몰아 죽이고 식인사실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난징대학살의 강간 피해자수 역시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바꾸고 덧칠한 예에 속한다. 아이리스 창에 의하면, 난징 강간 피해자는 30만명이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보다 많다. 저자는 이를 일종의 통계 페티시즘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후 세대는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저자는 전후세대는 과거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고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기억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해온 저자의 이번 기억연구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가짜와 진짜, 가해자와 희생자의 회색지대의 정체를 통해 민족주의 기억의 허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립을 해결하는 대안은 민족주의의 기억을 탈영토화해 인간적 권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제3의 시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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