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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광장-이계문 서민금융진흥원장·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조선왕조실록’에서 읽는 부채 탕감 정책
‘조선왕조실록’에는 가난한 백성을 위해 부채 탕감 정책을 펼쳤던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효종 3년에는 흉년에 정부 구휼미로 빌려준 곡식을 갚지 못하는 백성들에 대해 3500석을 면제했다. 정조 6년에는 경기도에 재해가 닥쳤을 때 재해 정도에 따라 20~35%의 환곡을 탕감했다. 또한 현종 6년에는 ‘곤궁하여 굶주리는 자, 의지할 데 없는 노약자’에게 공사(公私)의 부채를 탕감했고, 고종 21년에는 ‘10년 이상 된 사채’를 상세히 조사해 부담을 덜어줬다고 한다. 흔히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고 하지만, 흉년으로 어려워진 백성들을 도우려 했던 선조들의 고민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의 부채 관련 정책도 이러한 고민들의 결과다. 외환위기, 카드대란 등 몇 차례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신용회복위원회 채무조정제도를 비롯해 개인회생, 파산 등 현재의 지원체계가 마련됐다. 그러나 일반 채무자에 비해 상환능력이 부족한 기초생활수급자, 중증장애인, 고령자 등 취약계층에게 적합한 채무조정제도는 다소 부족했다. 파산제도 역시 채무액이 크지 않은 취약계층이 이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 같은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신용회복위원회는 최근 취약채무자 특별감면제도를 시작했다. 상환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기초생활수급자, 중증장애인, 70세 이상 고령자, 장기소액연체자 등이 지원대상이다. 1500만 원 이하의 소액 채무를 가지고 있는 취약채무자에게 감면율을 확대 적용하고, 3년 동안 감면된 채무의 50%를 성실하게 상환하면 남은 채무를 모두 면제한다. 기존 신용회복위원회 채무조정이 채무감면과 장기분할상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 시행된 제도는 상환능력에 따라 일정기간 성실상환하면 남은 채무도 없애주는 ‘청산형’ 채무조정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취약채무자 특별감면제도는 앞으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까. 필자가 전국 47개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 중 21곳에서 직접 상담한 32명의 서민 중 안산에서 만난 한 일용직 근로자는 중증 청각장애인이었다. 50만원 남짓한 소득으로 어렵게 생활하고 있던 그는 생활비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금리 대출을 받았고, 임금 체불 등으로 소득이 불안정해 연체를 하고 말았다.

목포에서는 채무조정이 확정된 일용직 근로자를 만났다. 그는 사업에 실패한 후 취업과 실직을 반복하면서 약 17년간 연체된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채권이 여러 번 매각되면서 이름조차 생소한 회사들로부터 겪은 상환 독촉과 추심의 고통을 눈물로 호소해왔다. 다행히 두 분 모두 채무를 일부 감면받고 장기간 분할 상환하도록 조정이 된 상태이다.

중증장애인과 장기소액연체자인 이들이 새롭게 시행 중인 특별감면제도를 이용한다면 최대 70~90%의 원금을 감면받을 수 있다. 또한 3년 간 상환계획을 절반 이상 성실히 이행할 경우 나머지 채무를 모두 면제받게 된다. 만약 1500만원의 채무가 있는 취약채무자가 특별감면을 받는다면 원금의 최대 90%인 1350만원을 감면받고, 나머지 150만원 중 절반인 75만원을 매달 2만1000원씩 3년 동안 상환하면 된다.

채무 문제의 일차적인 책임은 개인에게 있지만 대내외적인 경제 상황과 부실 대출 등 우리 사회의 책임도 존재한다. 필자가 만난 중증장애인, 장기소액연체자 모두 채무를 악착같이 상환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경제적 재기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는 분들이었다. 단지 몸이 아파서, 채무조정제도를 몰라서 장기간 채무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채무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지원과 배려다. 이것이 취약채무자 특별감면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가장 아픈 곳부터 빠르게 치료해야 하듯이, 우리 경제가 활력을 찾고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가장 취약한 계층에 있는 분들이 빠르게 건강한 경제주체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이에게 손 내미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빚으로 인해 불행의 문턱에 선 이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소외된 백성의 삶을 보살핀 선조들의 배려와 상생의 정신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계문 서민금융진흥원장·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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