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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입자면접·제비뽑기·위로금…전세, 어쩌다 이지경까지
집주인 ‘가려받기’ 가능한 상황
애완동물 유무 등 깐깐히 따져
전셋집 입성에 ‘운’도 따라야
“다른집 구할테니…” 돈 요구도

#. 서울 서초구의 아파트를 전세매물로 내놓은 A씨는 최근 ‘세입자 면접’을 봤다. 4년 동안 계약관계를 무리 없이 이어나갈 세입자인지 깐깐하게 가려 받겠다는 취지다. A씨는 “신축 아파트라 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성인 자녀가 있고,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는 세입자를 들이기로 했다”며 “이 단지 전셋값이 최근 3주 만에 3억원 뛴 상황이어서 더 오를 것을 걱정한 이들이 면접에도 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새 임대차법이 지난 7월 전격 통과된 이후 가뜩이나 부족한 전세매물이 씨가 마르면서 과거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이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세입자에게 마치 ‘고시’처럼 느껴지는 세입자 면접뿐만 아니라 제비뽑기, 단체 집 보기 투어, 위로금 지급 등이 모두 현실화한 것이다. 전세대란이 만들어 낸 웃지 못할 광경이다. ▶관련기사 3·26면

▶합격·탈락에 희비 갈린 세입자…너무 어려운 세입자 고시?=15일 공인중개업계에 따르면 독일, 미국 등에서 보편화한 세입자 면접이 최근 활발해지고 있다. 자신과 잘 맞는 세입자를 들여 ‘임대 리스크’를 줄이겠다는 집주인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서초구 반포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집주인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화가 원만히 이뤄질 수 있는 세입자를 구하고 싶어한다”며 “때문에 직업은 물론 임차사유, 가족관계 등까지 묻고 있다”고 전했다.

세입자는 집주인의 면접 요구가 황당하기도 하지만, 전세매물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지라 어쩔 수 없이 응하는 분위기다. 집주인 A씨 역시 “계약을 하러 집에서 공인중개업소로 이동하는 30분 동안 전셋값이 5000만원 올랐다”며 “이게 전세난의 현실이다 보니 계약 희망자들도 집주인의 요구에 맞춰줄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지난 12일 한국감정원 기준으로 68주 연속 뛰었다. 청약 대기나 학군 수요가 계속되는 와중에 새 임대차법과 실거주 의무 강화 등으로 매물 품귀 현상은 날로 심화하고 있다.

▶“줄을 서시오~”…전셋집 입성, 평생 쓸 운도 끌어모아야= 지난 13일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진 ‘전셋집을 보러 간 날 9팀이 몰려 가위바위보를 했다.’는 사연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전세매물로 나왔던 서울 강서구 가양동 가양9단지, 전용 49㎡(15층) 매물은 2억6200만원에 당일 거래 완료됐다. 이날 집을 둘러본 9개팀 중 5개팀이 현장에서 계약 의사를 밝혔고, 이들은 가위바위보를 거쳐 제비뽑기로 계약 대상자를 정했다. 기존 세입자가 이사 가는 날짜에 새로운 세입자가 맞춰야 하는 조건도 있었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해당 매물을 중개한 공인중개사는 “전세물건이 귀해진 상황에 임대보증금 증액 상한이 정해진 임대사업자 등록 매물이어서 사람들이 몰릴 수 밖에 없었다”며 “일반 전세매물 시세가 3억3000만~3억5000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싼 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 전세매물을 보러 간 B씨도 “집주인이 1시간만 집을 보여준다고 해서 부동산 4곳을 통해 온 4개팀이 한 번에 집을 보러 들어간 적이 있다”며 “집을 보는 와중에 누가 먼저 계약금을 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말했다.

중개업소도 분주하다. 집주인들에게 “전세 내놓을 생각이 있느냐”고 전화를 돌리지만, 나오는 매물은 거의 없다는 게 공인중개사들의 설명이다. 매물이 나오더라도 온라인 상에 띄울 시간이 없다. 기존 대기자에게 줄 매물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계약금을 먼저 쏘고 집을 보는 일도 흔해졌다. 송파구 가락동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집을 내놓고 가계약금이 꽂히기까지 2시간도 안 걸렸다”고 했다.

▶“다른 집 구해 나가겠다, 조건은 5000만원”= 전세난 속에 자신의 권리를 악용하는 집주인과 세입자도 늘고 있다. 터무니없는 위로금도 그 중 하나다.

과거엔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 만기 전 나가 달라고 요구할 때 위로금이 등장했지만, 지금은 전세 만기를 앞두고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지 않는 조건으로 위로금을 협상한다.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 전세를 준 C씨는 “세입자가 ‘다른 곳으로 이사하려면 전셋값이 얼만 줄 아느냐’며 4000~5000만원을 요구했다”며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금액의 10배”라고 말했다.

수고비를 요구한 사례도 있다. D씨는 “기존 세입자가 전세계약 중간에 나가면서 다른 세입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계약이 한 번 파기됐다”며 “그런데 기존 세입자가 ‘집을 보여주느라 너무 힘들었다’며 수고비를 달라고 한다”고 했다. 비슷하게 집주인이 계약 희망자들에게 ‘전셋집 둘러보는 비용’을 요구한 경우도 있다.

송인호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략연구부장은 “새 임대차법으로 신규 물량은 집주인이, 기존 물량은 세입자가 주도권을 쥔 상황”이라며 “대책도 마땅치 않아 전세를 둘러싼 혼란은 최소 2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봤다.

양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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