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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주, 배우이자 제작자로…“‘베르나르다 알바’, 목 마른 여배우들의 우물”
여성서사 뮤지컬의 새 역사 ‘베르나르다 알바’
주연부터 제작까지…발 벗고 나선 큰 언니
‘공연 할래?’ 한 마디에 따라온 여배우들
“깊이 있는 탐구의 여성 서사, 목 마른 여배우들의 우물”
26년간 무대에 섰던 배우 정영주가 제작자의 옷을 입었다. 여배우들이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다. 여성서사 뮤지컬의 새 역사를 연 ‘베르나르다 알바’의 제작을 맡은 그는 “남자 주인공이 나와야 티켓이 많이 팔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라며 “관객과 배우 모두 여성서사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박해묵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백마 탄 왕자도, 구원을 기다리는 공주도 없었다. 저마다 꽁꽁 묶어뒀던 에너지를 발산하는 열 명의 여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남편의 8년상을 치른 어머니와 다섯 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통해서다. 잘 생긴 남자 배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남주(남자 주인공)의 이야기가 ‘잘 팔린다’는 지레짐작은 산산이 깨졌다.

“대단한 착각이었어요. 배우도 관객도 여성들의 이야기에 갈증이 있었더라고요. 저 역시 ‘여배우 이야기는 관심 없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관객들은 오히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초연(2018)은 소위 ‘광클’과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의 현장이었다.

첫 주연을 맡은 이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던 날, 정영주(50)는 온몸으로 기운을 느꼈다. “단순히 재공연을 넘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공통의 정서가 만들어지더라고요.” ‘재연의 의지’는 정영주를 움직였다. “‘배우 나부랭이’가 뭘 할 수 있겠냐”며 고심했던 것도 잠시. 20년 넘게 배우로만 살아온 그는 제작자라는 무거운 옷을 입었다. “아무도 할 것 같지 않으니 결국 제가 해야겠더라고요.” 그의 이름 앞엔 이제 ‘배우’이자 ‘프로듀서’라는 직함이 더해졌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고, 입안은 모조리 헐어버릴 만큼 스트레스와 싸우며 작품에 몰두했다. 지난한 길을 거쳐 ‘베르나르다 알바’(1월 22일~3월 14일·정동극장)의 개막을 앞둔 배우 겸 프로듀서 정영주를 만났다. “이젠 확인사살하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당당한 웃음이 멋드러지게 피어났다.

배우이자 제작자로 무대에 서는 정영주는 요즘 내려놓고 이해하는 과정을 배우는 중이다. 박해묵 기자

▶ 제작자로 세운 무대…“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작품이기에”=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부캐’(부캐릭터)가 아닌 ‘본캐’(본캐릭터)로서의 작업이었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재연을 마음먹고 무대에 올리기까지 걸린 시간만도 일 년이 넘었다. “미간에 주름이 펴질 날이 없더라고요.(웃음)”

첫 과제는 극장 섭외와 라이선스 확보였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라이선스를 가져오기 위해 미국의 제작사와 반 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비즈니스 영어’의 어려움에 “급한 대로 파파고를 돌렸고”, 영어 잘하는 후배를 섭외해 메일을 주고 받았다. 새삼스럽게, “영어 공부에 매진하던 시기”라고 한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메일을 기다렸다. 6개월간 밤낮없이 메일함을 들여다 본 끝에 라이선스를 따냈다. 무대를 올릴 극장을 찾고 섭외하는 것도 제작자 정영주의 역할이었다.

재연을 확정한 이후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그의 입김으로 초연 당시 불러모은 여배우들이 다시 한자리에서 만났다. “초연 때 감언이설에 넘어와 출연료와 배역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함께 해줬어요.” 황석정, 오소연, 전성민을 비롯한 초연 멤버 8명이 재연에도 흔쾌히 함께 했다. 재연 무대에선 더블 캐스팅으로 확장, 18명의 여배우가 작품에 참여한다. 여배우들에게 그만큼의 ‘설 자리’를 만들어준 작품이다. 오디션 경쟁률도 엄청 났다. “다섯 캐릭터를 뽑는데 500명이 왔더라고요.”

이들 모두 총대 멘 정영주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부조리와 불합리를 참지 못해 정치, 사회 시위 현장에도 빠지지 않는 그는 공연계에서도 ‘할 말 하는 언니’로 통한다. 동료와 선후배들은 정영주의 손을 기꺼이 잡았다. “뱉은 말은 행동으로 하고 부당하다 생각하면 바꿔야 하고, 그래서 욕도 먹지만 그런 모습을 믿고 봐주는 친구들도 있더라고요.” 뭐든지 ‘대충’을 모르고, 말과 행동을 달리 하지 않으니 어느새 공연계에선 ‘따르고 싶은 선배’가 됐다.

“지금 저희 여배우들은 말도 안되는 개런티를 받고 무대에 서고 있어요. 이 금액을 받고 남자 배우들에게 하라고 하면 쉽지 않을 거예요. 체감상 남자 배우들의 1만분의 1도 안 되는 개런티예요.”

그럼에도 무대는 움직이고, 작품은 이어간다. 정영주를 포함한 18명, 오디션에 참여한 500명의 여배우에게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만큼 의미있는 작품이다. 여성 관객이 절대다수인 시장구조 안에서 “남성편향적 작품은 언제나 우위를 차지”해왔다. “여성 서사는 개발되지 않았죠. 퀴어 이야기도 레즈비언이 아닌 게이 이야기를 다룰 만큼요.” ‘베르나르다 알바’는 목 마른 여배우들의 우물이었고, 빈곤한 주제 속에 내린 단비였다.

“그게 이 작품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작품이었다면, 다른 여배우들이 나온 작품이라면 했을까요. ‘베르나르다 알바’는 여성의 이야기이자, 전 세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깊이 탐구한 작품이에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적으로 캐릭터적으로 분출할 수 있는 것이 많아요. 솔직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이죠. 그러니 이 작품에 무한한 자만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배우이자 제작자로 서는 자리에서 정영주는 내려놓고, 이해하는 과정을 배운다.

“25년을 배우로 지내다 제작을 병행하는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고 있어요. 역지사지의 마음, 이해의 과정이 있어야 합을 맞춰 한 조처럼 갈 수 있더라고요. 사람마다 심장 박동이 다르니, 무수한 반복을 거쳐 평균을 맞추야 해요. 어느 한 사람이 너무 튀면 다듬고, 어느 한 사람이 끄집어내지 못하면 뾰족하게 만들어줘요. 그러면서 조화를 맞추는 것이 공연이에요.”

정영주는 에이컴 배우학교 2기 출신으로 무대에 첫 발을 디뎠다. 우연찮게 시작된 길인 데다 배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2기 출신 중 지금까지 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정영주뿐이다. 그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채워지지 않아 자꾸만 채우려고 그만둘 수 없는 직업”이라고 한다. 박해묵 기자

▶ 우연히 접어든 길…앙상블 거쳐 주연배우까지 26년=뭔가 ‘큰 뜻’이 있어 배우가 된 것은 아니었다. “포스터 붙이는 남자가 잘 생겨 쫓아갔어요.” 포스터는 뮤지컬 제작사 에이콤의 배우학교 단원 모집 공고를 담고 있었다. 정영주는 ‘그 남자’를 만나기 위해 지원했다. 동기는 순수했다고 한다.

막상 찾아간 곳엔 “이미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나 같은 사람은 올 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에이콤 2기 중 현재까지 배우로 남아있는 사람은 정영주 뿐이다. ‘포스터를 붙이던’ 잘 생긴 남자도 1기 중 유일하게 남아있다. ‘맨 오브 라만차’에 영주로 출연한 뮤지컬 배우 서영주다.

배우 초년생 시절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노래와 연기와 안무를 반복했다. “혼나고 깨지는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앙상블 시절을 거쳐 감초 역할로, 주연을 압도하는 조연으로 수십 년. 1%의 주연배우만 돋보이는 세계에서 ‘OOO, OOO 외 다수’의 ‘다수’를 담당해왔다는 그다. “이번에 맡은 역할은 ‘외 다수’야. 이번엔 ‘등등’을 맡았어. 그런 농담 많이 했어요.” 굵직한 서사의 축을 담당하는 주연 배우가 된 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배우 인생 26년차에도 그는 늘 ‘허기’를 느낀다고 했다. 그에게 배우는 “채워지지 않아 자꾸만 채우려고 그만둘 수 없는 직업”이다. 매작품마다 모든 걸 쏟아내니, 돌아서면 빈 공간이 늘어난다. 매순간 번뇌와 고민을 반복한다. “박수 소리 크기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고, 내 연기의 부족함에 반발하지도 않아야 해요. 거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으면서 마음껏 누려야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요.” 때로는 도를 닦는 심정이라고 한다.

“‘타이타닉’의 오케스트라는 배가 두 동강이 나도 연주를 멈추지 않아요. 예술은 그런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그 위대한 것을 얼추 흉내내며 쫓아온 것이 26년차 정영주예요. 울고 싶으면 제 뒤에서 울고, 웃고 싶으면 저를 보고 웃으세요. 어떤 작품으로든, 제 연기가 감정의 해소, 스트레스의 쓰레기통이 되는 설득력을 가지면 좋겠어요. ‘유 아 낫 얼론(You are not alone)’. 배우로서의 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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