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四色] 이름 실종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초면에 통성명을 하고 나면 나이 물어보고 결혼 여부와 자녀까지 진도를 빼는 불편한 사람들이 아직도 종종 있다. 형, 동생을 따져 상황에 맞는 호칭을 붙임으로써 실수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 ‘언니’로 부르고 반대일 땐 하대로 직행하는 일이 벌어져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호칭을 정하기 위해 유쾌하지 않은 절차를 거치는 일은 이제는 ‘몰상식’의 범주에 드는 세상이다.

지구상에서 반말하면 싸움 나는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영미권에서 유학중인 아이들 이야기다. 교장 선생님께도 “하이, 미스터 마틴”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에서 온, 한 살이라도 많은 형이라면 무심코라도 “하이, 카일” 했다가는 어른들은 상상하지 못할 큰일이 벌어진다. 왜 이다지도 민감할까?

‘형님’이라고 부르면 존중하는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 하대하는 것으로 여기는 정서는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신분이 엄격했던 시절의 유산인가? 이름에 담긴 정체성만으로는 부족해 거창한 직함을 붙이고, 붙일 직함이 마땅치 않으면 ‘사장님’으로 진급시킨다. 인구 대비 ‘사장님, 사모님’이 가장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 아닐까 싶다. 젠체하고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존대 취향이 ‘이름 실종’을 가속화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또 한 가지 편치 않은 일은, 인정의 표현에 후한 한국인들의 특성 탓인지, 가족관계에 관한 호칭들이 너무 빈번하게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모, 고모, 삼촌네’ 식당에서 밥 먹고 ‘언니네’ 가게에서 생필품을 사고 술자리에도 피를 나누지 않은 ‘오빠, 언니, 형님, 동생’이 가득하다. 장모는 물론 친구 어머니도 ‘어머니’로 부르는 게 당연하고, 처음 만나는 시니어를 향해선 ‘아버님, 어머님’으로 불러야 예의 바른 사람인 듯하다. 부르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좋은 관계가 필요해서, 부르는 사람의 인성이 담기기 때문에 과잉 존대에 빠지기 쉬운 듯하다.

권위적인 호칭의 문제 극복을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기업들이다. 상명하달식 조직을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조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직급 파괴를 공언하는 회사들이 자주 등장한다. 성명 뒤에 ‘님’을 붙이거나 ‘프로’ ‘담당’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어떤 회사는 닉네임이나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른다. 직급에 의한 차별과 권위적 조직문화에 익숙해져 단순히 직급을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는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곤 하니 영어 이름까지 등장한 것이다.

우리말의 ‘씨’ 정도에 해당하는 ‘Mr, Ms’만 붙이면 그가 설사 대통령이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건 영미권의 얘기일 뿐, 맥락 없이 불러도 대통령이 더 편한 우리는 다르다. ‘홍길동 씨’로 부르면 쌍방이 다 불편하니 ‘홍길동 님’ 정도는 돼야 하고, 마이클도 한국에 와서는 ‘마이클 님’으로 고생하는 정도니…. 의존명사 ‘씨(氏)’ 자체가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지만 체감상은 아랫사람에게 쓰는 정도로 낮아져 있다.

관계의 문을 여는 호칭도 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차별 없는 존중의 첫걸음이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에 ‘님’자를 붙이는 정도로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예의는 지키고 과공비례(過恭非禮)는 버리자. 이름 불리는 것을 불편해하지도 말자. 부르라고 지은 이름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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