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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고려청자

청자의 요람 월주요 장인들은 오월국이 멸망하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다. 새로이 둥지를 튼 곳은 용천요와 경덕진요. 광종(光宗, 925~975)은 월주요 장인들을 고려로 부른다.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황해도 배천군 원산리 등지에 40m나 되는 벽돌가마를 만들고 청자를 빚는다. 970년대로 추정하는 때 만든 우리나라 최초 청자다. 중국식 벽돌가마에 월주요 장인들이 담갈색 청자유를 발라 만든 녹갈색 ‘청자순화4년명항아리(국보 제326호 靑瓷淳化4年銘壺)’는 고려청자의 기원이다.

993~1019년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다. 개경이 불타고 현종(顯宗, 992~1031)은 나주로 피신한다. 청자를 아끼고 사랑했던 예종(睿宗, 1079~1122)은 전남 강진에 황실용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를 만든다. 고려청자 장인들은 길이를 20m로 줄인 진흙가마를 만들고 재벌구이를 시도한다. 그야말로 비취옥 같은 녹청색 청자를 구워낸다. 월주요 청자 고비색(古秘色)을 훌쩍 뛰어넘은 고려청자 비색(翡色)은 이렇게 탄생한다. 그 뒤로 고려에서는 ‘청자’라 부르지 않고 ‘비색’이라 부른다.

세 차례에 걸쳐 30년가량 계속된 거란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무신세력이 성장한다. 고려청자는 선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누구라도 우람한 듯 유려하고 불안한 듯 치솟는 매병 곡선을 온 몸과 마음으로 감상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비색이 발색의 극치를 보여준다면, 청자 곡선은 상형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중부·이의방·이의민 등으로 계속된 난을 겪으면서 어려움에 처한다. 최충헌 형제가 무신정권을 수립하면서 혼란을 수습한다. 공예태후의 다섯 아들 중 세 아들, 인종으로부터 의종(毅宗, 1127~1173)을 거쳐 명종(明宗, 1131~1202)으로 황위를 이었던 그 시절 비색청자에서 상감청자(象嵌靑瓷)로 넘어간다. 비색 유조에서 곡선 상형을 거쳐 상감 회화로 이행하면서 고려청자는 절정에 이른 것이다.

1146년 2월 정묘일 인종(仁宗, 1109~1146) 황제가 보화전에서 승하하자 태자 현(峴) 의종(毅宗, 1127~1173)은 대관전에서 즉위한다. 인종 황제와 공예태후 임씨의 맏아들이다. 의종은 어머니 공예태후에게 효도를 다한 형에게 ‘공효(恭孝)’라는 시호와 ‘인종(仁宗)’이라는 묘호를 올린다. 3월 갑신일 장릉에 장사했다. 시호와 묘호를 적은 인종시책과 함께 고려청자를 부장한다. 비색으로 찬란하다. 철화기법으로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토끼 눈을 장식하고 상형기법으로 연꽃 받침대를 만들고 투각기법으로 입체감을 더한 데다 투각 장식한 뚜껑 교차점을 상감기법으로 메운 ‘청자투각칠보문개향로(국보 제95호 靑瓷透刻七寶紋蓋香爐)’는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선언한다.

비취옥 비색에 유려한 곡선을 더하고 학과 구름을 상감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326호 靑瓷象嵌雲鶴文梅甁)’은 말과 글로는 그 아름다움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절정을 보여준다. 14세기 고려청자는 다시 강진으로 요지를 옮긴 뒤 분청자로 넘어간다.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가교를 만들면서 오랜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 민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암각화·김치·태권도·금관·K-팝 등 문화상징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비색 청자가 두드러지는 것은 여러 세대에 걸쳐 끈질긴 노력이 영롱하게 꽃피웠기 때문이다. 즐기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고려청자는 질그릇과 사기그릇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우리를 비색으로 질타한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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