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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죽을 때 뭐라고 말할까

생일을 며칠 앞둔 추석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갔다. 수영장. 프랑스 화가 드가는 죽기 전에 “나는 정말 데생을 좋아했다네”라고 말했다는데, 나는 죽을 때 뭐라고 말할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옆에서 듣고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 테니, 지금 신문지면에 미리 말해둬야겠다. 나는 정말 수영을 좋아했다.

60 생일을 맞아 남들처럼 그럴듯한 환갑잔치는 못할지라도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라 여기며 서울의 어느 호텔 한 달 수영장 이용권을 끊었다. 좀 비싸지만 그렇게 지갑을 못 열 정도로 비싸지는 않았다. 대중에게 덜 알려진, 생긴 지 얼마 안 된 호텔에 코로나 때문인지 평일에도 사람이 없었는데 추석엔 수영장은 물론 탈의실과 운동실에도 사람이 없었다. 다른 재주는 없어도 하늘이 내게 주신 재능이 있으니, 바로 사람 없는 수영장과 맛있는 음식점 찾는 재주. 레인에 아무도 없었다. 내 레인은 물론 옆 레인에도 내가 물에서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적막한 수영장은 2017년 3월 어느 날 이후 처음이다.

봄 학기가 시작돼 홍익대체육관이 다시 문을 연 첫날, 아침 일찍 수영장에 갔다가 얼어죽을 뻔했다. 학교 체육관이 문을 닫은 긴긴 겨울방학 동안, 12월에서 3월까지 난방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아 싸늘한 냉기가 도는 여자탈의실. 처음엔 ‘내가 샤워실을 개시했다!’고 기뻐 날뛰었다.

이 나이에 내가 미쳤지. 열이 뻗쳐도 며칠 기다렸다 아니, 몇 시간이라도 기다려 느지막이 오후에 갔으면 덜 추웠을 텐데. 젊은 애들이 뜨듯하게 데워놓은 뒤에 들어갈 걸.... 물속은 오히려 따뜻했다 온수가 나와서. 춥다고 넌더리치면서도 30분 헤엄치곤 물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갔으니 본전을 빼야지.

아무도 없는 샤워실이 깨끗하다만 뜨거운 물을 계속 틀어놓고 있어도 냉기가 가시지 않았다. 탈의실도 춥기는 마찬가지. 벌벌 떨며 머리도 말리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 부는 3월의 거리에서 미세먼지 뒤집어쓰고 집으로 걸어가다 감기에 딱 걸렸다.

그리곤 아파서 수영장에 발길을 끊었다가 한 달쯤 뒤에 갔는데, 시험기간이라 수영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안전요원인 아르바이트 남학생은 바닥에 매트를 깔고 누운 건지, 앉은 건지 모를 자세로 뭔가 손에 든 종이를 읽고 있고 (벼락치기로 시험공부 중이겠지) 스피커에서 라벨의 볼레로가 흘러나왔다.

라~라랄라....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무대에 오른 패션모델처럼 춤을 추듯 우아하게 걸어가 물에 몸을 던진다.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은 홍익대 대학원에 들어간 거라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나는 생각했다. 하루 입장권을 끊으려 “졸업생이에요”라고 말하며 졸업증명서를 들이밀 때처럼 내가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홍익대 수영장은 수심이 깊고 다이빙대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다이빙을 하지는 않았다. 다이버들이 멋있어 보여 어디 나도 해 봐? 객기에 큰맘 먹고 한두 번 다이빙을 시도하기는 했는데, 잘못 입수해 물을 엄청 먹고 창자가 튀어나올 듯 배에 통증을 느낀 뒤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포기했다. 다이빙은 순간이지만 헤엄치는 기쁨은 영원하다.

물에만 들어가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집처럼 편안하니, 참 진작에 수영선수를 했어야 했는데. 내가 왜 배영선수를 하지 않았는지? 육십 인생에 후회하는 게 어찌 그뿐이랴.

시인·이미출판 대표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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