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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천광산 철광캐던 삼미금속 영욕 함께한 산증인 윤석원 씨
달천광산 갱도 계획도, 철광 채취 사진 등 쇠부리축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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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울산경남=이경길기자][사진설명 : 달천광산의 마지막 채광업체였던 삼미금속 광업부장으로 퇴직한 윤석원씨는 근대 달천광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달천광산의 폐갱도를 활용해 울산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면 멋진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요?“

한반도 '철산업의 요람'이었던 달천철장. 울산 북구 달천동에 위치했던 달천철장은 현재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철장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울산시 기념물 제40호라고 쓰인 안내판 만이 과거의 영광을 대변하는 듯하다. 달천광산이 2002년 문을 닫을 때까지 마지막 모습을 오롯이 기억한 '철의 노동자'가 있다. 바로 달천광산 마지막 채광업체였던 삼미금속 윤석원(68·사진) 광업부장.

윤 씨는 1965년 대한철광개발 주식회사 울산광업소에 취직하며 울산과 인연이 닿았다. 동료들과 삼삼오오 조를 나눠 남녀 구분없이 노천 채굴에 투입됐다.

"노천 채굴을 하는 여성들을 보니 고향 부여(충남)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울산 여성들이 강철처럼 강하다고 느꼈죠."

대한철광개발은 1966년 민영화돼 삼미그룹으로 넘어갔다. 당시로서는 울산 대표기업인 현대자동차 못지 않게 알아주는 기업이었다.
"65년 당시 하숙비가 1천800원(쌀 한가마)이었는데 수습생 월급이 2천400원이 조금 넘었으니 괜찮은 보수였죠. 가족들도 국영기업체에 들어갔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제철산업이 활황기던 1970년대 초 울산에서 생산한 철은 모두 포항제철로 납품됐다. 윤 씨는 당시 철장에서 지표조사와 측량을 도맡아 했다. 74년에는 노천채굴에 이어 수직갱도를 개설했다. 315m에 달하는 수직갱도의 도면을 만드는 것부터 지하 매장량 조사까지 윤 씨의 손과 아이디어가 닿지 않은 것은 없었다.

"20여 년에 걸쳐 지하 315m까지 갱도를 개설했지만 93년 철광석 생산을 중단하면서 225m 상부에서 수직갱도 채굴도 중단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으로 일궈낸 곳이었는데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달천철장은 울산의 산업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자동차, 화학 등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서며 광공업은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달천광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지만 그는 광석을 찾아내고 지질조사를 하는 일을 놓을 수 없었다. 퇴직 후 인근 아파트 공사 업체에서 진행하는 지질조사를 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달천광산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 채 지금도 광산 주변인 농소 3동 자신의 집에서 간혹 창문 너머 달천철장을 추억한다.

"폐업할 때 수직갱도를 메우지 않고 덮개로 덮은 뒤 그 위에 흙을 채웠는데... 수직갱도를 활용하면 좋을텐데 여러 선결과제가 있으니 그것부터 해결해야 겠지요. 달천광산이 울산의 폐갱도 활용 관광 상품으로 개발돼 멋진 관광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멀리 문경까지 가지 않아도 광산을 볼 수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가 소장하고 있는 달천광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수직갱도 계획도 등 각종 도면은 다음달 13일부터 3일간 북구청 광장에서 열리는 제12회 쇠부리축제 주제전시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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