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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재환 칼럼> ‘위안과 힘’이 보태질 봄을 기대하며

  • 2017-02-07 17:33|노재환 논설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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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환 헤럴드경제 G밸리 논설위원

[헤럴드 지밸리 = 노재환 논설위원 기자]봄맞이가 이렇게 힘든 건 줄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이상기온의 여파로 조류독감에 가축들이 생매장되고 농가의 한숨마저 깊어가는 요즘, 마음의 냉기가 가실 날이 없다.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아직도 봄이 올 기미는 없다. 이게 다 세상 탓, 사람 탓인가 싶어 불쑥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한국인이 참을성이 많다면 그건 아마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설사 그렇게 어렵게 찾아오는 봄일지라도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 또한 너무 짧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봄꽃이 아른한 향을 선물하는 시간 길어야 일주일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가는 하루하루가 아쉬울 정도로 올해 역시 피어날 꽃들은 그렇게 빨리 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청춘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고 이 세상 전부를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기상으로 넘치는 그런 시기 또한 그리 길지 않다. 아니 매우 짧다. 짧기 때문에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 그 아까운 청춘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스러지고 마는 게 작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자식을 둔 부모로서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태극기만 보아도 애국가만 들어도 콧등이 시큰해지게 하는 나의 조국. 그런 나의 조국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의 나라사랑은 언제나 짝사랑인가 보다.

‘백성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그만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긴 옛날에는 너나없이 어려웠다. 물론 나라도 어려웠다. 그러니 나 살기도 바쁜 판에 남을 돌볼 여력이 있겠는가.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먹으면 다행인 시절이었다.

나 어릴 적 만해도 하루 세 끼 중 점심은 찬밥을 끓여 먹거나 수제비 그도 없으면 시래기죽으로 점심을 대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우리가 밥걱정 않고 산지는 불과 반세기 안팎이다. 그런데 2017년 정유년 (丁酉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또 다시 밥걱정, 잠자리 걱정, 일자리 걱정을 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점점 살기가 좋아져야 하는데 어찌된 것이 점점 살기가 팍팍해지니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다.

전 세계의 경제에 균열이 왔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 또한 직격탄을 맞았다. 미국도 거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넘쳐나고,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 대국이 된 중국도 수천만의 농민공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유리걸식하며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말 그대로 전 세계가 경제공황의 늪에서 허덕이고 실업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제대국 미국, 중국, 일본도 이런 판국이니 우리나라는 오죽하겠는가. 국토 면적도 넓고 자원도 많은 나라들은 언젠가는 회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경우가 다르다. 국토 면적도 적고 자원이 거의 없다.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는 물론이고 우리가 날마다 먹고 쓰는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 만큼 우리나라는 여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경제 체질상의 지표가 낮다. 그러다 보니 회복 속도도 느릴 뿐만 아니라 경기가 좋아지는 데도 한계가 있는 건 당연하다.

이런 경제 공황 시기에는 서민들과 소외계층들이 더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경제가 좋을 때에도 어려웠다. 그러니 금수저-흙수저, 헬조선 등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요즘 같은 때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부도 실직자와 빈곤층에 대한 여러 대책을 수시로 발표하고 그들을 돕기 위한 여러 정책을 쏟아 내고 있다지만 턱없이 부족한 예산과 실정에 가로막혀 아등바등하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실직은 곧 극빈층으로의 전락으로 이어진다. 극빈층이 된 사람들은 무능해서 게을러서도 아니다. 단지 비비고 오를 언덕과 한 가닥의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환경 때문이다.

정부는 이들을 탓하기 전에 이들을 돕기 위한 컨트롤타워를 현실에 맞게 내놓고 실행해야 한다. 이들을 위해 보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복지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들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줘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최근 발표된 예산안을 보면,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던 정부가 가장 먼저 삭감한 것은 소방예산이다. 담배세 증액으로 소방예산을 지원하겠다던 정부가‘소방안전교부세’를 내세워 지자체에 떠넘긴 채 전혀 시정되지 않고, 또다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지원과 격려를 아낌없이 퍼주어도 시원찮은 판에 예산을 오히려 줄이다니 말 다르고 행동 다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붉어진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과정 중 드러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여파로 문화계에 대한 지원이 눈에 띄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없애버린 곳도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한 그릇의 밥’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혹자는 그것이 찬밥이든,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밥이든 아무려면 어떤가, 단지 위장을 허기로부터 채워주고 약간의 혈액과 배설을 통해 쏟아내는 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생체학적으로는 그 말이 옳다. 그런 모순과 오해 속에서 당당하게 굴러왔고 또 열심히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념은 굶주림 앞에서 마비되는 법, 꿈과 예술가적 자존 또한 추위 앞에서는 결국 무디어지기 쉽다. 그들의 숨은 노력과 땀의 결실을 막아버린 행위는 상상만으로도 허탈감에 힘이 쭉 빠진다. 캠퍼스를 들고 밤거리에서 빵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고흐를 다시 한 번 더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소망 한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건만, 꿈을 포기한 채 입을 꾹 다문 청년들, 가난한 예술가들의 숨은 공로가 무산되는 이 사회. 꿈과 상상을 파먹고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도대체 답이 나오지 않는 인색한 공식이다. 그 지고지순한 땀과 노력의 결과에는 희미하게 지워져 있는 쓸쓸한 현실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꿈과 상상은 곧 밥이요, 관심과 지원을 먹고 자라는 거목이 될 나무이며, 우리의 미래다. 어리석은 왕으로부터 최소한의 은전을 갈망하기 보다는 자신의 꿈과 상상을 정직한 쌀 한 톨과 물로 바꾸려는 단순하고 천진한 그들의 의지를 아는가. 부디 배고픈 이 땅의 청년들에게 위안과 힘이 보태지는 봄이 오기를 꿈꿔본다.


fanta732@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