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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해창 선임기자의 세상읽기>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20주기
어느 덧 세월은 흘러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지 8일로 20주년입니다. 1994년 바로 이날, 84세를 일기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김 주석입니다. 사인은 동맥경화에 따른 급성 심근경색. 당시 북한은 중대발표를 통해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하고 심장쇼크가 합병됐다”고 밝혔습니다.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은 단연 해외토픽이었습니다. 보기 드문 1인 장기집권에다 사실상 10년 이상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한 독특한 정치체제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바로 코앞에 다가온 분단이래 첫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벌어진 돌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25~27일로 예정돼 있었으니까 불과 17일 전에 변고를 당한 겁니다. 

김일성 주석과 후계자 김정은

바로 그날, 아마도 토요일 막 오후였지 싶습니다. 기자는 기분 좋게 주말을 맞아 경부고속도로로 수원 집을 향하던 중 만남의 광장 바로 못 미쳐서 방송을 접하고 바로 핸들을 꺾어 휴게소를 통해 회차 해 다시 정부종합청사로 되돌아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김 주석이 사망한 장소는 묘향산 초대소(향산별장)였습니다. 묘향산에서도 가장 경관이 좋기로 소문 난 해발 1900고지인 호랑령 자락에 자리한 아주 특별한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안남북도와 자강도가 맞닿는, 평양에서 직선거리 120km에 위치한 곳으로, 김 전 주석이 애용하거나 국빈 등 귀빈을 맞이한 장소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50만㎡의 부지에 한옥 형태의 대형 복합건물로, 별장 1동과 경비 등 지원시설 3동으로 1981년 11월에 착공해 3년 만에 완공됐다고 합니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1989년 독일 통일

더 깊은 자료를 찾아보니, 김 주석이 애용한 곳인 만큼 의료시설이 평양에 있는 중앙정부 병원 못지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김 주석 사망과 관련 구구한 설이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해(危害), 고의방치 등 설이 난무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자는 대부분 낭설일 거라 믿습니다.

아무튼, 졸지에 상주가 된 김정일은 부친이 사망한 이후 생전에 그 장소를 단한 번도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효의 장소로 여긴 듯합니다. 실제로 지난해인가요. 미국측이 공개한 구글어스 위성사진을 보면, 시설물이 모두 철거되고 대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기도 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북한이 발표한 대로 김 주석은 스트레스에 갇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지병에 노구를 이끌고 회담 장소를 미리 찾아 머물면서 회담 준비상황을 꼼꼼하게 분야별로 직접 챙기고 진두지휘했다고 합니다. 회담 일정이 실무선에서 8월로 논의되자 펄쩍 뛰면서 7월로 앞당기도록 채근한 것도 김 주석이었다고 합니다.

개성공단 노동자들에 공급돼 오다 암거래 확산으로 최근 문제가 된 초코파이

일설에는, 그날 분야별 최고 책임자 회의를 소집해 김영삼 대통령과 남측대표단이 기차편으로 오도록 철로 복원을 지시했지만 노동력 동원이 불가하다는 보고를 다그치자 담당 책임자가 망설이다 몇 년 동안 식량배급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고백했고, 노발대발하다 혈압이 급상승했다는 겁니다. 모쪼록, 김 주석은 갖은 스트레스에 압도당해 쓰러졌고 끝내 세상을 뜨고 만 셈입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김 주석이 안달복달했던 이유가 나옵니다. 가장 믿었던 국가 소련이 85년부터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선언하고 체제해체 수순을 밟습니다. 사회주의가 빚은 경제난이 핵심 원인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소련이 이 모양이 되는 사이 독일이 서독중심으로 흡수통일(89년)을 이룹니다. 이어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구권이 몽땅 몰락하면서 민주화가 전개됩니다. 자원도 원조도 끊긴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진 북한입니다.

그런데 남한은 어떠했습니까. 경제적 기반, 그러니까 산업화 기틀을 다진 뒤 민주화 열기를 뿜어내면서 동시에 88서울올림픽을 성황리에 치루고 이어 내친김에 북방외교에 바짝 나섭니다. 마침내 1991년 소련에 이어 이듬해 중국과 전격 수교합니다. 동구권 국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흰 옷을 입고 군부대 시찰에 열중인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

여기에 더 쇼킹한 것은 유엔 등 국제사회에 북한 붕괴에 따른 소프트랜딩 문제가 거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지경이 되자 김 주석은 핵무장을 결심하고 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고 맙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 클린턴 정보는 북한 영변의 핵시설 폭격을 기정사실화했고, 한국 정부는 여차하면 또 전면전이 터지겠다 싶어 “타임”을 외칩니다. 그러던 중 평화주의자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을 자청, 중재자로 나섰고 김 주석과 만나 가까스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맞은 김 주석의 사망입니다. 그렇다면이후 북한은 어땠을까요. 후계자 김정일이 삼년상으로 칩거하고 ‘유훈통치’를 합니다. 그러는 사이 사회주의국가와의 협력은 망가져 최악의 경제난이 가중된 데다 가뭄과 태풍 등 자연재해마져 겹쳐 수백만 명이 아사하고 수십만 명이 탈북하는 사태를 빚고 맙니다. 바로‘고난의 행군(95~97년)’시기였습니다.

결국 김정일은 1998년 주석직을 폐지하고 국방위원회를 신설합니다. 주석직은 아버지 김일성이 유일하다는 의미지만, 자신은 국방위원장을 맡아 정치에 실패한 당의 권한을 빼앗아 군부로 넘겨주는 이른바 ‘선군(先軍)정치’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경제난 더 가중되고 부정부패로 결과는 더 참담했습니다.

김 주석 사후 20년이 흘렀습니다. 3대 후계자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 주석 ‘따라하기’에 무지 공을 들이지만 외형에 그칩니다. 아버지 직함을 피해 제1국방위원장에 올라 선군정치의 폐해를 없애려 고모부 장성택을 앞세웠지만 중국과의 경협사업을 추진하면서‘백두혈통 중심’이라는 ‘노동당 10대원칙(올해 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하고 맙니다. 김정은이 택한 ‘핵과 경제병진 노선’은 1960년대 할아버지가 김 주석이 추구했던 ‘국방과 경제병진노선’과 빼다 닮았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머리를 때리는 격입니다.

최근에는 인민복 대신 할아버지가 즐겨 입은 흰색 계통의 복장을 입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군부대만 찾고 있습니다. 젊은 지도자의 방황이 엿보입니다. 7일에는 최고 격인 공화국(정부) 발표를 통해 오는 9월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한 응원단을 보내겠다면서 핵무장의 당위성을 설파했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핵을 문제 삼으며 거리를 두는 혈맹 중국을 다분히 의식한 결과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한 핏줄 북한의 오늘과 미래입니다.
 

/hchw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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