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심각한 경제난과 만성적인 식량난’이라는 북한 경제를 상징하는 수식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정일 역시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인민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는 약속을 나름 지켜보고자 경제 개혁·개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김정일의 경제 개혁·개방 시도는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1984년 합영법 제정이었다. 북한은 그 해 공업과 건설, 운수, 과학기술, 관광업 분야에서 외국기업과 합영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합영법을 제정했다. 외자유치와 선진기술 도입을 통해 경제활성화 토대를 마련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소유형태와 시장규제를 유지한 상황에서 부분적인 조치에 그친 탓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계열 일부 자본유치 외에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공산주의 압박정책과 이에 따른 신냉전 구도도 걸림돌이었다.
김정일의 두 번째 시도는 1990년 초반 이뤄졌다. 북한은 1991년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 등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시도하면서 1991년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 설치와 1992년 외국인투자법 제정 등을 통해 경제회생을 도모했다.
특히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는 이전과 달리 시장경제논리에 따른 기업경영을 인정하는 등 다소 진일보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과 영국, 네덜란드, 그리스, 태국 등이 투자의향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과도한 개입과 1차 북핵위기가 불거지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김정일의 세 번째 시도는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로 대변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조명록 차수의 방미,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등으로 대외적인 환경이 어느 때보다 우호적인 시점이었다.
7·1 조치는 생필품 가격 현실화 및 노동자 임금 인상, 배급제 등 사회보장 축소, 생산관리제도 개선, 농업개혁의 시범적 실시 등을 내용으로 했다.
하지만 시장경제확산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개혁을 주도한 내각과 이에 반발한 노동당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좌초하고 말았다. 7·1 조치는 2009년 화폐개혁으로 인해 오히려 반시장적으로 퇴행하고 말았다. 때마침 불거진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로 인한 2차 북핵위기는 김정일의 마지막 승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 대북전문가는 “북한은 김정일 시절에도 경제특구를 비롯해 경제개혁을 시도했지만 북핵문제와 사회주의 경제운용 틀을 바꾸지 않는 제한적 조치로 인해 모두 실패로 끝났다”며 “무엇보다 경제개혁을 추진할 능력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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