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비구속적 성격…미·중·러 모이는 최대 지역협력체 무대
초기 무역·경제 중심에서 중소기업·여성 등 포용하는 ‘지속 성장’
레베카 파티마 산타 마리아 APEC 사무국장 단독 인터뷰
레베카 파티마 산타 마리아 APEC 사무국장이 지난달 30일 제주 서귀포 국제컨벤션센터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
[헤럴드경제(서귀포)=최은지 기자] “많은 사람들이 내년 APEC(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을 계기로 한국에 온다는 것에 대해 기대하고 있습니다. 개최국인 한국도 APEC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관계를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APEC 개최국의 가장 큰 경제 효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2025년도 APEC 의장국을 수임하면서 내년에는 5차례의 고위관리회의(SOM)와 외교.통상 합동각료회의(AMM), 정상회의(AELM)를 비롯해 통상, 재무, 광업, 관광, 해양, 중소기업, 식량안보, 여성, 산림 등 분야별 장관회의까지 200여회 이상의 APEC 관련 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특히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APEC 정상회의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국제 일정 중 하나가 바로 이 APEC 정상회의로, G2 정상의 ‘대좌’의 무대가 내년에는 우리나라가 될 수 있다.
레베카 파티마 산타 마리아 APEC 사무국장은 지난달 30일 제주 서귀포 국제컨벤션센터(ICC)에서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를 갖고 “APEC은 1년 내내 회의가 열리기 때문에 개최국의 진정한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느끼고, 흡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K-POP, K-드라마, K-푸드, K-화장품 등 기대를 하고 있고, APEC이 그 기회를 열어줄 수 있다”고 귀뜸했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지난달 29~31일 열린 제19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위치한 APEC 사무국의 수장(Executive Director)으로, 이전에는 말레이시아 국제통상산업부 사무총장, 동아시아·아세안 경제연구센터(ERIA) 선임 정책 연구원을 지냈다.
APEC은 총 회원국 21개국, 전세계 인구의 약 37.9%(29억1000명), GDP의 약 61.5%, 총 교역량의 약 50.4%를 점유하는 세계 최대의 지역협력체다. 환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경제적 협력을 위해 1989년 호주 캔버라에서 각료회의로 출범했고, 이후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제안으로 1993년부터 정상회의로 격상됐다.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아세안 6개국과 함께 창설멤버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창설멤버인 한국이 초기에 중국과 대만, 홍콩이 가입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가 1991년 APEC 의장국으로 서울에서 제3차 APEC 각료회의를 개최했는데, 당시 중국과 대만, 홍콩의 가입 문제가 최대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국가’(State) 단위가 아닌 ‘경제’(Economy) 단위로 참여하는 타협안을 제시해 중국(People’s Republic of China), 대만(Chinese Taipei), 홍콩(Hong Kong, China)이 동시에 APEC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만과 수교 상태였고, 미수교국이던 중국은 APEC 가입에 도움을 준 한국 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한중 관계 정상화의 초석이 됐다. 현재까지도 APEC은 ‘국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회의에서는 국기 게양도 허용되지 않는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최근 한국이 특히 역량 강화 측면에서 기여하는 분야는 디지털과 교통분야”라며 “한국이 교통실무그룹(TPTWG) 의장국을 맡고 있고, 전기자동차, 자율주행, 드론 등과 관련해 많은 아이디어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폭넓게 이뤄지는 논의를 한 데 모아 정부 정책 입안자에게 제안하는 APEC에 대해 “앞에서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아닐 수 있지만, 뒤에서 조용하게 이뤄지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레베카 파티마 산타 마리아 APEC 사무국장이 지난달 30일 제주 서귀포 국제컨벤션센터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
APEC은 자발적·비구속적 성격으로 합의를 이행하는 원칙을 갖고 있다. 의사결정은 컨센서스 방식에 따르며, 합의사항은 비구속적으로, 정상 간 합의사항은 정치적 약속(political commitment) 차원으로 접근한다. 한마디로 협정에 서명하는 절차가 없다. 대신 APEC은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대화와 이니셔티브를 시작하고, 폭넓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법적 권한을 갖는 구속적 성격의 세계무역기구(WTO)에 기여한다.
APEC은 초창기 현안 논의에 비즈니스 업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APEC은 다른 다자회의체와 달리 기업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공식 민간 자문기구(ABAC·APEC 기업인 자문위원회)가 있다. 매년 정상회의 계기에 ABAC과의 대화, 최고경영자회의(CEO Summit)를 개최해 정상과 기업인 간의 교류의 장을 마련한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기업인이 초대를 받는 ‘옵저버 역할’이 아니라 공식 자문기구를 통해 테이블에 앉는다”며 “우리는 경제, 비즈니스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경제체마다 다른 시스템을 표준화하는 역할을 중요하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94년 정상회의 채택, ‘2020년까지 역내 무역·투자 자유화 실현’을 담은 ‘보고르 목표’(Bogor Goal)가 종료되고 2020년에는 향후 20년의 목표가 담긴 ‘푸트라자야 비전 2040’이 채택됐다. 무역투자, 혁신·디지털 경제, 포용적·지속가능한 성장을 3대 핵심 비전으로 나아가고 있다. 초기 무역 자유화와 투자에 집중됐던 APEC의 방향이 디지털 경제와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APEC이 큰 비즈니스에만 초점을 둔다는 비판도 있지만, 중소벤처기업과 여성도 중요한 APEC의 의제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중소벤처기업 실무그룹(APEC SME)에서는 중소벤처기업이 대기업의 공급망에 포함되고, 뒤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중소벤처기업 CEO 중에는 여성 기업가가 많이 있어 초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의장국인 페루에서는 APEC 최초로 통상·여성 합동장관회의가 개최되며 중소기업과 여성 등 경제 주체를 포용하는 경제성장과 관련한 논의가 이뤄졌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연결성’(Nexus)을 강조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중소기업과 무역, 여성과 무역의 연결되고 있고, 이것이 포용적 성장의 중요한 예”라고 짚었다.
이어 “경제 성장에서의 성취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포용적 성장의 핵심”이라며 “대기업에서 이뤄낸 밸류체인, 공급에 중소기업도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비공식 경제분야에 있는 이들이 공식적인 경제분야에서 금융에 접근하기 쉽고 정부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방적 지역주의를 추구하는 APEC의 도전은 세계무역의 분열이다. 최근 경제가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다자주의에서 일방주의로 회귀하는 모양새다. 다자무역체제의 복원이 APEC의 주요 의제다. 산타 마리아 사무국장은 보호주의에 대해 “기술적인 장벽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많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정책지원유닛(PSU)에서 표준을 추적하고 상황을 공유한다”며 “실제 비관세장벽이 기술장벽으로 가장(disguise)해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APEC은 아태자유무역지대(FTAAP)를 장기적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