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前 해운·조선 호황
손해보험사 경쟁적 RG인수
리스크닥치자 경영위기 함정
눈앞 이익보다 장기적 전략을
보험회사는 사회 각 주체의 다양한 리스크를 흡수하는 순기능의 대가로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로, 리스크를 평가하고 인수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리스크가 집적되는 대상이므로 거대 리스크를 감내하기 위한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손해보험사의 경우 지진, 쓰나미, 태풍 등과 같은 단일 자연재해로도 회사의 존립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금세기 들어 리스크 중심 경영이 확산되고 금융감독당국도 리스크 기반 감독체계의 정착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최근까지도 보험회사의 리스크 관리 실패로 인한 경영위기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08년 리먼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신흥국 중심의 교역규모 확대에 따른 물동량 증가로 해운 및 조선경기가 유례 없는 호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운임 및 선박가격 상승은 선박 발주량 증가로 이어져 국내 중소형 조선사들이 무차별적으로 선박 신규건조 시장에 진입하였다. 선박 건조계약의 특성상 선주는 선박가격의 80% 정도를 공정 진행에 따라 조선사에 미리 지급하게 되며, 이 선급금의 환급을 담보하기 위해 RG(Refund Guarantee) 계약을 요구하게 된다. 즉, 선박 인도에 실패할 경우 RG를 인수한 금융회사가 선급금을 대지급하여 선주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구조다. 선박 건조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중소형 조선사의 경우 신규 수주를 위해 RG를 제공할 금융회사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영업실적에 급급한 일부 손해보험사는 RG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인수하게 되었다.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한 운임 및 선박가격 급락은 선박 수주 감소 및 발주 취소 사태로 이어져 중소형 조선사의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상당수의 조선사가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대상에 편입되었다. 운영자금 부족으로 인한 선박 건조작업 차질로 납기 내 정상 인도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선주는 RG보험금을 잇달아 청구하게 되었다. 이에 손해보험사는 거액의 보험금 지급이 불가피하였으며, 재보험을 통한 리스크 전가에 실패한 일부 회사의 경우 많게는 수천억원까지 손실을 입게 되어 심각한 경영위기로 이어졌다. 로이즈 등 글로벌 재보험사가 국내 중소형 조선사에 대한 RG 인수를 꺼리고 있는 상황에서 손해보험사는 신용등급도 없는 외국 재보험사에 부보함으로써 위기요인을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전국시대 초(楚) 장왕에 얽힌 “당랑포선 황작재후(螳螂捕蟬 黃雀在後)”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 하나, 뒤에 참새가 있다”는 의미로,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스스로의 위기는 보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손해보험사들이 RG를 경쟁적으로 인수하던 당시에도 은행의 중소형 조선사 RG 인수 거절, 글로벌 재보험사의 재보험 인수 거부 등 위기요인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당시 위기요인을 직시한 대형 손보사의 경우 RG 인수를 제한하여 손실을 전혀 입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영업실적에 어두워 장밋빛 전망만을 바라보고, 위기요인에는 애써 눈감으려 한 일부 손해보험사의 의사결정이 결국 심각한 경영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보험산업은 현재 급격한 기대수명 증가, 의료비지출 확대, 자연재해의 빈발 등 수많은 잠재적 위기요인의 영향권에 있다. 회사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단기 실적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험산업이 종합 리스크관리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에서 발생 가능한 위기요인들을 선제적으로 재점검하고 관리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