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탄’쌓는 시중은행…3년전 외환정책 학습효과
2008년엔…환율잡으려 달러 대량매도
방어할 실탄 바닥나
원화값 폭락에 속수무책
“결국 韓銀 경매방식 통해
시중銀에 달러 직접 공급”
2011년은…
그리스 디폴트우려 현실화
금융시장 또다시 출렁
원화값 이틀새 40원 폭락
외환보유 상황 좋아졌지만
또다시 핫머니 공습주의보
“불특정 다수에게 달러를 내다팔다니…. 한국 외환당국이 뭔가 크게 잘못 판단한 것 같다.”
2008년 7월.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리먼사태’가 터지기 전이었다. 한 외국계 클라이언트(고객)가 모 증권사 이코노미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의 외환 상황을 물었다. 당시 정부는 치솟는 환율을 잡으려고 시장에 달러를 내다팔고 있었다. 외국계 클라이언트는 “한국 외환당국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해 9월 ‘리먼사태’가 터진 후 외환당국은 시장을 상대로 불특정 다수에게 달러를 내다판 대가를 혹독히 치렀다. 원화가치가 달러당 1500원대까지 폭락하는데도 정작 이를 방어할 ‘실탄’이 부족했던 것이다.
원화가치의 폭락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1900억달러에 달하는 단기외채에 비해 외환보유액(2400억달러)이 충분하지 않다는 외국계의 우려 때문이었다. 그나마 여유분인 500억달러에는 미국의 양대 모기지 업체인 프래디맥과 패니매 발행 채권(약 500억달러)이 포함돼 있었다. 실제로는 없는 달러나 마찬가지였다.
리먼사태가 터진 2008년 9월 이전에 외환당국이 달러를 얼마나 많이 소진했는지, 외환보유액 추이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2008년 6월 2582억달러에 달하던 외환보유액은 7월 2475억달러, 8월 2432억달러, 9월 2396억달러로 급감했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당시 외환당국이 하루에 60억달러까지 달러를 내다판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유럽발 재정위기의 여진이 가라앉지 못하면서 환율이 급변동해 외환시장에 긴장감이 돌고 있다. 금융 당국과 금융회사들은 과거와 같은 외환위기 상황을 겪지 않기 위해 외화 조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
리먼사태 후 국내 금융시장은 한ㆍ미 통화스와프 체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진정됐다. 또 하나는 외환당국이 시장에 달러 매도개입을 줄이고, 외화유동성이 부족한 은행에 직접 달러를 공급한 게 결정적이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당시 한국은행을 통해 경매방식으로 시중은행에 달러를 공급했다”고 말했다.
환율을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달러를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팔 게 아니라, 외화 유동성이 부족한 은행에 정부가 직접 공급하는 게 당시 외환정책의 정답이었던 것이다. 한 증권사 이코노미스트는 “정부가 이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지적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의 디폴트 우려가 현실화하면서 국내 금융시장은 또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값은 14~15일 이틀새 40원 가까이 폭락했다. 최근 원화값은 역외시장인 차액결제선물환(NDF) 시장에서 소수 투기세력의 호가로 결정되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에 대한 핫머니(투기성 자금)의 공격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핫머니의 판단 근거는 간단하다. 국내 은행에 외화유동성의 문제가 생겼을 때 외환당국이 즉각 달러를 공급할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유 외환 상황은 3년 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다. 2008년 9월 말 1594억달러에 달하던 은행의 단기채무는 올 6월 말 기준 1161억달러로 축소됐다. 우리나라의 단기외채(6월 말 기준)는 1497억달러이고, 외환보유액(8월 말 기준)은 3122억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외환당국이 방심해선 안 된다는 게 시장의 공통된 지적이다. 핫머니의 공격이 시작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또다시 시장에 달러를 무차별적으로 내다팔아버리면 순식간에 소진되는 게 외환보유액이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유럽 위기와 외환보유고 점검’ 보고서에서 “현재 외환보유액 규모는 고전적 기준의 적정 외환보유액을 웃돌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증권투자자금 유출 규모를 고려하면 광의의 적정 기준에 크게 미달한다”고 강조했다.
신창훈 기자/chunsim@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