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단임 대통령제의 한국 정치에서 늘 보아온 장면들이다. 위풍도 당당했던 대통령이 차기 대권주자들에 주연 무대를 내주는 순간, 시계침은 정확히 ‘임기 말’을 가리켜왔다.
문민정부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직 대통령이 그랬고, ‘내 임기 중 레임덕은 없다’고 자신했던 이명박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은 때이른 선거정국과 정권의 도덕성 시비로 인해 조산(早産) 징후가 완연하다.
여당 서울시장의 뜻하지 않은 사퇴와 유럽발 재정위기의 확산, 측근 비리로 구속기소된 청와대 홍보수석 등이 켜켜이 쌓이던 차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통령 사저 논란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기왕에 벌어진 일도 문제지만, 정작 여론에 불을 붙인 것은 대통령 특유의 직설화법과 청와대의 위기대처법이었다. 측근 비리를 접하고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거나, 민생고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내 임기 중에 두 번의 경제위기가 온 것이 다행”이라는 말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여과 없이 전해졌다.
야당의 고발로까지 이어진 사저 논란에 대해서는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쳐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답변이 전부였다. 특히 사저 논란과 관련해서는 “정치 공세”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참모들도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이 300억원이 넘는 개인 재산을 사회에 헌납했다. 이런 마당에 내곡동 사저를 통한 ‘땅값 차익 기대’라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렇고, 실제로도 그럴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고 “(국민 여론을 고려해) 사저 이전 계획을 신속히 백지화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일이 급했을까.
논란의 핵심인 ‘값싼’ 사저 부지와 ‘값비싼’ 경호시설 부지 간 상관관계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우선이다. 대통령 사저 이전이라는 공적 업무에 청와대 주요 참모들이 뒷짐 진 연유도 설명돼야 한다.
여론은 청와대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요구하고 있는데, 정작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문책 리스트에는 경호처장만 올라 있다.
사저 논란이 장기화하면서 국정 공백과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ㆍ미 FTA 비준과 국방개혁,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감기약 슈퍼 판매 등을 위한 법안들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임기 후반의 국정기조인 공정사회와 공생발전도 동력을 잃은 기색이 역력하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40%대의 안정적 지지율을 자랑하던 이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역시 추락을 거듭하며 30% 밑으로 떨어졌다.
청와대 담장 안과 밖의 온도 차가 이렇게 커진 것은 레임덕을 지나치게 의식한 청와대가 자기방어 논리에 골몰한 결과로 보인다. 레임덕은 정권의 실정에 의한 상처이기 전에 시간과 권력의 속성에 가깝다. 그렇다면 레임덕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다. 좋건 싫건 품고 가는 것이 정도(正道)다. 초조한 마음에 아전인수하거나, 여론과 담장을 쌓으면 지는 것이다. 명분도 실리도 잃어버린다. 이 대통령의 임기는 16개월이나 남아 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y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