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힘없는 서민에 애착가진 이두호 화백
고희앞두고 ‘만화 한국사 수업 시리즈’혼신의 열정…
초등학교 4학년때 재능을 알아주신 선생님. 그분따라 무작정 시골 학교로 전학…그리고 각종 사생대회 상 휩쓸어
젊은 시절 한때 2년간 서양화를 원없이 그려봤지만 만화에 대한 열정 사그러지지 않아…양반·노비의 역사적 삶과 만화가 인생
40여년을 한복 입은 모습 그려 눈 감아도 조선시대 복식을 그려낼 것 같지만 아직도 내게 고증은 여전히 어려운 일.
교수 퇴임후 ‘만화 한국사 수업 시리즈’ 시작 밑그림부터 감수까지 혼자서…한페이지 그리는데 꼬박 하루 걸리기도 하는 고난의 작업
땅딸막한 몸집, 넓은 미간에 들창코, 콧날 중간까지 내려오는 덥수룩한 머리. 정말 볼품없이 생긴 이 사람이 머릿발을 세우거나 머리털을 뽑아 주문을 외우면, 뱀ㆍ독수리ㆍ호랑이 등으로 몸이 자유자재로 변한다. 이쯤 설명하면 19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는 무릎을 탁! 칠 것이다. 바로 추억의 만화 주인공 ‘머털도사’다. 한동안 추석ㆍ설 명절 연휴면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TV 앞에 모이게 했던 묘한 마력의 소유자. 못 생겼지만 정의감에 불탔고, 재능보단 됨됨이를 깨우친 “뭘 좀 알았던” 진정한 소영웅.
지금이야 일본의 포켓몬과 짱구에게 밀리는 모양새지만, 당시 ‘머털이’는 ‘누더기 도사’, ‘왕지락’, ‘꺽꾸리’, ‘묘선이’ 등 주변 인물들과 함께 안방극장을 차지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적 해학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의 철학까지 갖춘 머털도사는 지금까지도 한국 만화계에서 가장 토속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역사만화에 천착해 온 이두호 화백은 “어차피, 구중궁궐 얘기는 잘 모르겠어요. 살아본 것도 아니고. 일반 서민 얘기는 가깝고 쉽더라구요. 그래서 그릴 뿐이에요.”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조선을 배경으로 평민이나 백정이 진짜 영웅으로 등장하는 만화 속에서 그는 비록 정의는 당대에 실현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뤄진다는 믿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
‘머털이’의 아버지 만화가 이두호(69) 화백을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쯤 찾았다. 서울 광진구 군자동에 마련된 20여평 남짓한 작업실 한쪽 방엔 책상 위로 4절지 도화지와 각종 연필, 지우개, 펜이 가득하다.
그는 2008년 8월 세종대학교 교수직을 퇴임한 뒤부터 김영사가 출간하는 ‘이두호의 만화 한국사 수업’ 시리즈를 시작해 현재 8권째를 그리는 중이다. 도화지에는 행상 차림의 중인, 평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해설까지 연필로 적혀 있다.
밑그림, 펜칠, 채색, 감수까지 이 화백은 대부분을 혼자서 손수 작업한다. 그래서 한 페이지에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한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4ㆍ19혁명 때까지는 그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는데, 이거 만만치가 않네요.”
이 화백은 ‘바지저고리’만 그리는 만화가란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암행어사 허풍대’ ‘바람소리’ ‘덩더꿍’ ‘임꺽정’ 등 우리 문화와 역사, 우리의 옛 것들을 그리는 일이 그의 전공(?)이기 때문이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는 그를 “장르 만화라는 게 없는 한국 만화계 현실에서 가장 회화적인 것으로서 역사만화를 선택해 발전시키고, 당대의 의식주 등을 직접 취재하고 연구해서 작업하는 책임있는 작가주의를 개척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0여년 넘게 한복 입은 모습을 그려서 눈 감아도 척척 조선시대의 복식을 그려 낼 것 같은데, 고희를 바라보는 원로만화가에게도 고증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만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 색깔과 입체감을 부여받으면서 더욱 그렇다. “복식이 골치 아파요. 예를 들어 세종대왕 용포를 그린다면, 자료의 영정사진은 앞모습만 나와 있고 뒷모습은 없죠. 실제론 앞뒤가 똑같은데 모르는 상태에선 답답하죠. 그럼 구태여 뒷모습을 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 손자도 본다고 생각하면 뒷모습까지 구체적으로 그려 넣어야죠.”
‘나무 한 짐을 하고 가더라’라는 한 줄짜리 글은 만화의 한 컷에선 계절에 따른 수종, 산들의 야생화의 채색까지 신경써서 표현해야 한다. 군중을 그릴 때도 비슷한 고민이 생긴다. 동학혁명에 나선 동학군의 모습에서 어떤 이는 두루마기 행장을 하고, 대부분은 보퉁이를 허리에 맨다. 간혹 어깨와 가로지르게 맨 이도 그려넣는다. “우리 어렸을 때는 책보퉁이를 어깨와 허리에 가로질러 매지 못하게 했어요. ‘엄마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가윗자로 매는 게 편하니까 속설이래도 편하게 맨 사람도 있을 테고. 이거 그리면서도 내가 스스로 너무 모른다. 참 모른다! 하죠.”
▶만화와의 운명적 만남=이두호 화백의 학창 시절의 꿈은 만화가가 아닌 서양화가였다. 대구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에도 각종 사생대회 상을 휩쓸었고, 대학도 홍익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미술에 재능을 발견하고 매진하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교사 남무오 선생을 만나면서부터다. 전교 사생대회에서 1등을 하자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남 선생의 미술실로 직행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페인트 냄새 짙던 미술실에서 매일 그림을 그려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무엇을 보든 화폭에 어떤 구도로 담을까만 생각했다. 6학년이 되자 남 선생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어린 이 화백은 다음 날 아침 무작정 남 선생이 전근간 학교로 등교했다. “선생이 다신 오지 마라 했는데, 학교로 안 돌아가고 대구 극장 밖에서 맴맴 돌다가 집에 갔어요. 사흘째 그러니까, 남 선생이 문방구 뒤뜰로 불러다가 ‘그러면 너 엄마 모시고 와라’ 했죠.”
남 선생, 어머니와 함께 다시 학교로 가서 교장 선생을 만났다. 당시 교장은 “아이가 이렇게 원하니 우리가 보내줍시다” 했고, 이 화백은 다니던 큰 학교를 두고 전근 간 선생을 따라 작은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도 화실로 출퇴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서울에서 만화 출판계 한 인사가 화실에 들렀다가 이 화백의 그림을 보곤 김종래 선생의 ‘박문수전’ 표지를 의뢰했다. 평소 그가 좋아하던 만화가였다. 이 인사는 중학교 2학년생에게 직접 만화를 그려볼 것을 권했고, 그가 겨울방학 내내 그린 128쪽의 ‘피리를 풀어라’가 이듬해 3월에 정식 출간돼 서점에 깔렸다. 한 해 공납금을 내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저작료로 받았다. 그 뒤 고등학교 시절까지 ‘등불’ 등 만화 네 권이 ‘이두호’란 이름 석 자를 달고 나왔다. 가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가게 됐던 만화가의 운명이 자신도 모르게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부터 만화를 그릴 생각이 없었어요. 출판사 사람은 서울 가자고 많이 꼬셨어요. 유명한 김종래 선생도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서. 그래도 우리 선생이 너무 어릴 때 돈을 알게 하면 안 된다고 반대하셨죠.”
▶서울 유학생 시절, 꿈을 짓누른 배고픔의 공포=그는 대학 재학과 군 복무와 제대 후 생계를 위해서 부업 삼아 만화를 그릴 때에도 만화가가 되려는 생각을 추호도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홍익대 서양학과 1학년 시절, 가난했던 고학생은 돌도 씹어 먹을 20대에 하루 끼니를 뭘로 때우느냐가 당장의 고민이었다. 시골에서 갖고 올라온 책들도 먹을거리와 바꿔 먹은 지 오래. 친구와 고구마 2개를 사서 반 쪽씩 나눠 점심과 저녁을 해결했다. 캔버스, 유화물감 살 돈이 없어서 천막 천을 떼고, 제재소에 가서 나무를 구해다가 직접 캔버스를 만들고, 유화물감은 페인트로 대신했다. 학과 실습시간에 창덕궁 입장료가 없어서 혼자만 따로 집으로 돌아와 상상으로 창덕궁을 그렸다. “그 당시 정신상태가 안 좋았던 거 같아요. 멀쩡한 주전자 찌그러뜨려서 그리고, 숫가락 휘게 그리고. 친구와 나는 생존을 위해서 굶는데, 다른 학생들은 (6ㆍ3사태 이후)단식투쟁한답시고 굶더라고요. 이런 게 상아탑인가 싶었죠.”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등록금과 결혼자금 마련을 위해 만화가 박기정 선생의 문하생으로 일했다. ‘소년중앙’에서 부록 연재도 시작했다. 1년여가 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제적부에서 그의 이름이 빠져 복학이 어려웠다. 그는 미련 없이 대학문을 나섰다. 그러길 10년, 만화가에 대한 멸시가 여전하던 때 그는 만화가로서의 삶을 자인하지 못한 채 약 2년간 서양화를 원 없이 그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열정을 시험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그는 다시 만화가 그리고 싶어졌다.
▶우리말, 우리정서, 우리만화= 만화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뒤에는 역사 만화를 즐겨 그렸다. 양반ㆍ노비ㆍ비렁뱅이ㆍ기생ㆍ보부상 등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살았던 비루한 개인들의 삶을 네 컷 만화로 불러와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만화 속 주인공은 대개 힘 없는 개인이나 소시민이다. ‘암행어사 허풍대’ 속 허풍대는 엄행어사란 권력의 타이틀을 갖고 있지만 겁많고 심약한 성격이다. ‘임꺽정’에서도 평범했던 범인이 도적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해, 편집장이나 독자로부터 “도대체 임꺽정은 언제 도적이 되는 거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생김새도 잘 생긴 외모보단 못난이에 가까웠다. ‘머털이’뿐 아니라 영웅 ‘장독대’도 못 생긴 축에 속한다. 그는 주인공의 외모보단 매력적인 성품에 초점을 맞췄다.
책의 제목이나 주인공 이름에도 순우리말이 많다. 목이 때가 껴 까맣다고 해서 ‘까목이’, 또 매맞을 짓 했다고 해서 ‘또매’, 방실방실 잘 웃는다 해서 ‘방실이’, 우직한 성품의 ‘장바우’ 등 말 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우리가락의 기본인 ‘덩더꿍’, 사람이나 물건의 가장 못된 찌꺼끼를 뜻하는 ‘째마리’는 정의롭지 못했던 시대권력에 저항하는 소시민의 복수를 그리는 내용에 안성맞춤인 제목이었다. 이 화백이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으로 꼽은 ‘덩더꿍’은 프랑스에서 ‘El sonido del pueblo’란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 번은 순우리말을 일본어로 오인한 독자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째마리’에서 “우리 다모토리(‘소주를 큰 잔으로 마시는 일’을 뜻하는 순우리말) 한잔 어때?”라는 대사였다. 한 독자가 “이 선생이 어떻게 일본어를 쓸 수 있냐, 실망했다”고 전화를 해 왔고, 이 화백은 “거, 사전 한번 찾아보고 전화하쇼!”라고 대거리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주일 뒤쯤 그 독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와 “오늘 다모토리 한잔 어떻습니까”했고, 그는 이 독자와 만나 소주 한 잔을 걸쳤다. “저는 가급적 그 시대에 썼음직한 말을 쓰고 싶었어요. 한쪽엔 국어사전을, 다른 한쪽엔 역사사전을 두고 수시로 들춰보죠.”
그러다 김주영 작가의 소설 ‘객주’를 읽고 놀랬다. 너무 모르는 우리 말이 많아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지 않았던 것. 그는 김주영 작가와 다방에서 만나 400만원의 저작료를 주고, 종이 쪽지에 돈을 받았다고 끄적인 영수증을 즉석에서 받은 것으로 계약을 끝내고 만화 ‘객주’ 연재를 시작했다. 등장인물을 새롭게 넣고 빼고, 내용도 만화에 맞게 극화했다.
연재는 보통 일이 아니다. 매일 자기와 싸움의 연속이다. 이 화백은 매일 새벽 3시30분에 일어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신문 연재를 할 때는 오전 4시부터 2시간 가량 스토리 작업, 2시간 밑그림, 2시간 펜터치, 2시간 채색 등을 거쳐 오후 12시쯤 완결했다. 만화의 마지막 칸은 독자를 낚는 장치다. ‘그런데, 아 참!’이란 말로 끝내면 독자의 궁금증은 증폭된다. 그렇게 해놓고 나면, 다음 날 아침엔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할 지 고민에 빠진다. 고교동창과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신 다음 날엔, 이야기가 강변 나룻터에서 배를 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주인공이 보따리를 던져버리고 ‘나, 안 가!’라고 생짜를 부리는 것으로 때우기도 했다. 한번은 ‘신문의 날’엔 신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문하생의 말에 일손을 놓고 있다가,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1시간 만에 그동안의 등장인물 소개로 갈음한 적도 있다. “제자들한테는 절대 그렇게 일하지 말라고 그러죠. 그러면 작품이 허술해지니까. 나는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작품을 해보지 못했어요.“40년 넘게 펜대와 붓대를 잡고, 30년 넘게 ‘바지저고리’만 그린 만화계 거장의 불만스런 소회가 뜨악하게 조차 들린다.
그는 웹툰이 영화ㆍ드라마 창작의 원천이 되는 작금에도 한국만화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게 안타깝다. 1997년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만화가들을 줄줄이 소환하고, 만화를 검열한 역사가 불과 15년 전이다. 당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그 역시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이렇게 하면 문제되지 않을까’란 자기검열에 빠진다”고 했다.
어릴 때 읽는 만화는 어린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캔디’ ‘은하철도999’ ‘개구리소년 왕눈이’가 우리 만화영화인 줄 알고 보고 자란 ‘397(30대, 90년대 학번, 70년대 출생)세대’ 의 어린 시절 마음엔 슬픔과 낭만, 비극의 그늘이 은연 중에 배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짱구는 못말려’의 허무와 가벼움은 다음 세대의 정서에 또 어떤 영향을 줄까. 어쩌면 온천, 초밥, 기모노, 오사카 성이 슬쩍 우리 것으로 둔갑해 있는 이런 만화들이, 폭력적이라고 찍힌 19세 이상가의 학원만화보다 더 세고 오래 가는 멍자욱을 우리 아이들에게 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지숙 기자/jsh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