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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26일 ‘토종 정권의 최후’를 상징하는 순종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그 해 6월 10일에 있을 장례식에 거사를 하려는 학생들의 모의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민족의식이 강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학교별 대표는 사직동에서, 중앙고보ㆍ중동학교 학생들은 통의동에서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었다. 사회주의 계열인 노총도 거사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됐다. 그날 서울 장안은 학생과 시민들이 합세한 독립만세로 들끓었다.

6ㆍ10 만세운동은 쇠퇴하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우파든 좌파든 나라의 독립을 갈구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연장 시나리오, ‘호헌’을 반대하는 여론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1987년 6ㆍ10 민주항쟁은 학생, 개혁가, 종교인, 넥타이부대가 가세해 군부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사건이다.

6ㆍ10은 이처럼 숭고한 것인데 요즘 말들이 너무 많다. 또 보혁 대결이다. 6월 8일 개혁 진영이 서울 광화문에서 ‘제22회 민족민주열사 추모제’를 열자, 보수단체들이 “추모 대상에 간첩이 있다”며 맞불집회를 열면서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민족 화해를 도모하면 ‘종북’이란다. 밀사를 통해 7ㆍ4 남북 공동성명을 성사시킨 박정희에게도 종북이라 할 텐가.


문제는 6ㆍ10 때만 되면 ‘종북 논란’을 초래한 원인 제공자에게도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익힌 상당수 운동권이 이적단체로 판결이 난 조직을 구성해 해마다 6ㆍ10 때 남북한 회합을 추진하거나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는 등 툭하면 6ㆍ10을 악용했기 때문이다.

좌우를 넘어,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도모했던 1926년, 1987년만도 못한 2013년 6월 10일이다.

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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