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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詩는 용서와 화해의 눈물이야”
장승깎는 목공예가 김지명 시인…인명구조 · 재소자 교화 등 사랑 실천하는 자유인의 삶과 인생
장승 깎는 목공예가, 시집 4권을 낸 시인, 인명구조 대장, 재소자 교화 활동가 등등. 뚜렷한 직함만도 네댓 가지가 넘는 사람, 김지명(63) 씨. 일단 그를 김 시인이라 부르기로 하자.

과천 향교 쪽 관악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김 시인의 작업 공간,‘그냥 좋아서’는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손바닥 크기의 태극 깃발 수천 개가 정교하게 빼곡히 꽂혀 나부끼고, 그 둘레에 쳐진 줄에는 등산객들이 오가며 매단 형형색색의 소망 리본들이 쉴 새 없이 바람을 탄다.

최근에 불쑥 그를 찾았다. 13년 만의 재회다. 관악산을 오르내리다 그의 모든 것이 통째로 신기해 말문을 트고 차도 나누며 몇 차례 어울린 기억이 새롭다. 우선 여전할까 궁금했는데 적지 않은 변화에도 모습은 그대로다. 바람이 세찬 그날도 그는 새봄을 기다리며 희망의 솟대를 다듬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김지명 시인이 과천 향교방향 관악산 등산로 초입에 있는 작업공간에서 목공예를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나이도 이름도 없던 천애의 전쟁고아

김 시인은 전쟁고아다. 나이도 이름도 부모도 고향도 그에겐 꿈 같은 얘기다. 지리산 자락 남원에 있는 고아원 향육원이 인생 출발점이다. 그곳에 가게 된 내력도 그는 알지 못한다. 숨통이라도 트겠다고 8세 때 그곳을 뛰쳐나와 서울 뒷골목을 전전하며 구걸생활로 잔뼈가 굵었고 70년대 후반까지 부랑자 생활을 했다.

“고아원 원장님이 김 씨여서 김 씨고, 이름 첫자는 남자애들은 고아원이 있던 지리산의 지자를, 여자애들은 향육원 향자를 땄어.” 1951년 4월 1일생. 그런데 이것도 지어낸 것이다. “1968년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전쟁고아들에게도 호적을 부여하라고 했어. 동사무소에 불려갔는데 한자 이름과 생일이 있어야 호적에 올리지. 담당자가 성은 김 씨 그대로 하고, 지자는 한문으로 몇 개 써 보이기에 복잡한 건 싫고 얼핏봐서 2자에 점하나 붙은 게 있어 그걸로 하자고 했지. 그래서 갈지(之)자로 하고, 명자는 밝을 명(明)이라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도 없고 해서 그걸로 한 거지. 나이는 모른다고 했더니 역정을 내더라고. 12세 미만은 잘못을 저질러도 청소년보호소로 가. 그곳을 들락거리다 보면 몇 년이 지났는지 잘 몰라. 누가 생일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대충 18세쯤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러면 51년생 이렇게 된 거야. 생일은 어차피 모두 거짓말인데 대충 만우절이라고 했지.”



열여덟에 한글 깨우치고 시 800편 써

그는 다 크도록 우리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서울로 와 뒷골목 생활을 할 때 무지 추운 날에는 버스에 올라. 거지에게는 차장 누나들이 돈을 안 받아. 운전수 뒤쪽 엔진 위쪽에 쪼그리고 앉으면 시선은 둘 곳이 없고 그저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간판들이 교과서야. 심심해서 그냥 외웠더니 우리글에 눈이 떠지더라고.”

그랬던 그가 800여편의 시를 세상 밖으로 내놓았다. 감정이 북받칠 때면 꼬박 밤을 새우며 습작노트를 메웠다. 그의 시에는 ‘눈물’ ‘용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유독 많다. 두려움을 만지듯 사회에 화해의 손길을 꾸준히 내밀었다는 증거다. 그래서 그는 결국 화해는 자신과의 조우라는 말에 동감한다. 그러기에 그는 사랑도 믿음도 소망도 결국 ‘용서’가 없인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시는 감옥에선 폭동이 되지만, 병원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라고 시인 보들레르는 말했다. 물론 김 시인에게 있어 보들레르는 사치다. 그러나 슬픈 과거를 게워내듯 한 그의 시에는 분명 정신적 자유를 의미하는 폭동 이상의 횃불이 살아 숨 쉰다.

김 시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거리낌이 없다. 소년원까지 합치면 절도와 폭력으로 별이 7, 8개. 일반인이 보기에는 무시무시하다. 민폐를 도로 갚으려 97년부터 청주여자교도소 교화위원을 시작으로 영등포 안양 천안 김천 등지를 돌며 교화활동을 펼쳤다. “전쟁을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가혹한 피해자인데 알게 모르게 끼친 민폐가 부담이 됐어. 빵 하나 훔쳐 먹은 것도, 밥 얻어먹은 것도.” 여성 무기수들을 교화하고 돌아와 그녀들의 아픔을 대신해 쓴 독백 형식의 시가 ‘모정’ ‘마음은 언제나’ ‘죄인의 기도소리’ 등등이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생이별, 그 절절한 죄의식에 스스로 포로가 돼 밤새도록 용서를 기도하기도 했다.

김 시인의 자기희생적 이타심은 가히 병적이다. “열서너 살 무렵 광화문 사거리 국제극장 옆에 큰 음식점들이 있었는데 대문 앞에 덜 탄 연탄을 내다버리면 손을 호호 불어가며 깡통 밥을 먹곤 해. 한 번은 한 아저씨가 자꾸 쳐다보기에 고아원에서 배운 대로 식사하셨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기에 ‘이거라도…’ 그랬다가 구둣발로 걷어차였어. 또 한 번은 애가 울기에 마침 얻어 놓은 눈깔사탕 하나를 내미는데 애 엄마가 냅다 귀싸대기를 올리면서 거지새끼라고 하더군. 난 뼈저리게 느꼈어. 내 것을 남에게 줄 수 없구나. 큰 상처를 받은 거지. 몇 년 지나 누군가에게 뭔가를 줬는데 흔쾌히 받더라고. 그때 구름 탄 기분이었어.” 



과천시민대상 금메달 팔아 재소자 떡 선물

사실 그랬다. 그는 재소자들을 위해 너무나 헌신적이었다. 그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2000여통. 라면 박스로 두개가 넘는다. 험한 산악지대 공사를 하며 번 돈을 그들을 위해 쾌척했다. 97년에는 과천시민대상 수상 때 받은 금메달을 팔아 재소자들에게 새천년 첫날 떡을 돌리기도 했다. “강연 갈 때는 뭐라도 사가. 입이 즐거워야 귀도 즐거운 법이지. 그건 내가 잘 알아. 재소자들이 커피를 자유롭게 마실 수 있게 된 것도 나 때문이야. 술 담배는 안 되더라도 커피는 기호식품인데 미개인처럼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교정당국을 계속 설득했지.”

김 시인은 교화다운 교화가 되려면 사회적인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라 했는데 우리는 그걸 대수롭잖게 여겨. 뒷골목 거지였을 때 나에게 가끔 윗도리를 주신 분이 계셨는데 내가 그걸 추워서 벌벌 떠는 친구들에게 벗어 줘. 그러면 그 할머니가 이북 분이셨는데 “야이, 에미나이 새끼야 지도 없으면서 남 주기는…” 그러면서 벗은 거지는 굶어도 입은 거지는 얻어먹기라도 한다며 꾸짖으셨지. 그런데 그게 진짜였어. 거지라 하더라도 너무 추하게 입으면 못 얻어먹는다는 걸 알게 됐지. 그때 사회 구조가 그랬어. 인왕산에서 전쟁고아들이 같이 밥도 얻어먹어가며 뭉쳐서 살았는데 사춘기가 되면서 부끄러운 것도 알게 됐을 무렵 범법자로 나간 애들은 나름 갖춰 입고 대접도 받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하나둘 나쁜 길로 빠져들었지.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는 말한다. 사회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인생, 있으나 마나 한 인생,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인생 3가지가 있는데 자신은 모두 겪었다고. “음지에서 꼭 독버섯만 나오는 게 아니야. 콩 심은 데 콩 나는 원리는 식물 얘기일 뿐이야. 인간과 식물은 달라. 산삼 더덕 좋은 건 다 음지에서 나와. 사회는 나를 버렸어도 나는 사회를 버린 적 없다고 생각해.”

김 시인은 2001년 1집 ‘촛불’, 이듬해 2집 ‘어둔 밤 촛불이 되어’를, 그리고 60고개를 기념해 2011년 생일날 3집 ‘별 하나 지켜보며’와 4집 ‘그래도 달빛이 있기에’를 동시에 출간했다. 시집은 재소자나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대책 없이 무료로 몽땅 배포해 남은 게 없다. 다만 시인들의 창작 사이트 ‘마로니에 샘가’라는 사이트에 김 시인의 시가 차고 넘친다.



IMF 위기 때 상처받은 이들 숱하게 구해

김 시인의 호적에는 본관이 관악산이다. 호는 여산(如山)이다. “친한 화가 한 분이 산에 있으니까 산과 같으라고 그렇게 지어주더군. 산은 조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잖아. 나도 여기서 만든 것을 조건 없이 줘. 커피도 그렇고 장승도 그렇고 나만 빼고는 다 공짜야. 어차피 나는 내놓아도 사갈 사람 없으니까.”

그가 관악산에 정착한 건 1980년 초반. 사람 사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다. “어둠의 자식들은 개새끼라는 호칭을 받고 살아. 그게 싫었어. 너무 억울하잖아. 부모 없는 것도 서러운데. 그래서 알고 지내던 전과자 66명을 데리고 여기로 와 텐트치고 공사판을 나섰어. 그때 주먹 좀 썼지. ‘광명의 집’이라는 대형 텐트에서 합숙했는데 오전 3시40분에 기상, 4시에 국기 게양, 구호 외치고 6시까지 동네 쓰레기 치우고 8시30분까지 교통정리했어.”

김 시인이 인명구조대 대장을 맡게 된 내력도 각별하다. “그렇게 생활하다 사회적인 시선도 달갑잖고 해서 단체생활을 접고 기도원에 들어가 수양하고 다시 나왔더니 86년인가 엄청난 비로 고립된 대학생 14명을 구해준 게 인연이 됐어. 1990년에 정식으로 발족했지만 그전까지 합치면 20년은 넘어. 산불진압도 하고 목숨도 많이 구했지. IMF 외환위기 때 실직이나 도산으로 상처입은 이들이 몰려들면서 사고가 많았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숱했고 그래서 쓴 시가 나의 대표작 ‘관악산에 오시거든’이야.”

그에게 목각 공예는 각별한 삶의 일부다. “그럴 일이 있었어. 관악산 송신탑 공사 때 사찰 일대에 있는 쓰레기 정리과정에서 유명 사찰과 지독한 다툼이 있었어. 갑자기 강력반 형사들에게 긴급 체포돼 크게 고초도 당했고. 계곡 징검다리 난공사를 하면서 등산객들이 위험한 곳을 아무 탈없이 건넜으면 하는 바람에 그때 쓴 ‘징검다리’라는 시를 비로 세웠다고 자연보호 훼손, 쓰레기 파서 항의했다 해서 설교 방해, 쓰레기 허락 없이 파내 운반했다고 해서 절도죄, 주지한테 욕했다고 협박죄 그게 다야. 결국 집행유예 받고 나왔는데 너무 억울하고 분해 사고 칠 뻔했지. 그런데 그렇게 해서 뭐가 달라지나. 나와의 약속은? 처자식은? 교화 활동은? 결국 잘 참아냈지. 결국 3년 만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했고 그때부터 목각을 다듬기 시작했어. 끌로 분노를 파내다 보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려. 용서 하나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

장승 얘기가 나오자 오지랖 넓은 그다운 면모가 더 드러난다. 과천시와 캐나다 앨버타주 에어드리시(市) 자매결연 얘기다. “캐나다에 사는 잘 아는 분과 의기투합해 양쪽 자매결연을 주도했지. 10주년을 기념해 2005년 7월 1일 캐나다 국경일에 장승 5개를 현지에 조성된 ‘과천공원’에 주정부 허가를 받아 세웠어.”

지난해부터 단군신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작업장 한 편에 단군 흉상도 모셨다.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경기 국학원 소개로 거저 옮겨다 놓은 건데 내 할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나로선 뿌리 찾기인 셈이지. 지난해 어버이날 모셔다 놓은 것도 다 그런 이유야.”



이산가족찾기 ‘샌드위치 맨’이 바로 김 씨

그는 뿌리의 끈을 찾으려 애썼다. 80년대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이 눈물의 도가니를 이뤘을 때, 엄마를 찾겠다며 구구절절 사연을 적은 패널을 앞뒤로 매달아 눈길을 끌었던 그 ‘샌드위치맨’이 바로 김 시인이다. “보름 정도 지났을까, 전쟁고아 친구가 한 번 나가보자고 그래. 몸에 흔 적도 없고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나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더라고. 무조건 튀어야겠다 싶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부모를 찾습니다’고 써붙이고 고아원 띠 두르고 온갖 아이디어를 다 냈던 거지. 온갖 카메라 플래시가 내 앞에서 터지고 난리였어. 결국 다 소용없었지만.”

김 시인은 무(無)에서 유(有)라는 말로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한다. “염라대왕한테 바치는 시까지 썼어. 인생 한번 리얼하게 살았다고. 내가 가서 하나하나 보고하려고 해. 누구든지 이 세상 떠날 때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가잖아. 그러나 스토리 있는 인생을 살고 또 그 스토리는 가져가야 해. 그게 진정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김 시인은 90년대 후반 이후 10여년 사이 ‘신한국인상’ 등 굵직굵직한 상을 다수 수상하기도 했고, 몇 차례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기도 했다. 그의 남은 꿈이라면 불우한 전쟁고아들을 돕는 일. “성공한 이들이든 아니든 대부분 아픈 과거를 숨기려 해. 자식과 특히 손자 손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게지. 아직도 힘들어하는 이들이 숱해. 이런 일은 정부가 나서주면 좋은데 참으로 안타까워.”

김 시인은 한 가정에 어엿한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다. 넉넉지는 않지만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것은 순전히 김 시인의 작업 공간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부인 덕. 비록 타의에 의해 인명구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남을 위해서라면 여전히 언제 어느 때라도 흔쾌히 채비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따뜻한 차나 커피, 직접 만든 공예품까지 아낌없이 나눠주는 걸 낙이라면 낙으로 삼는다. “어느 날 보니까 학교도 안 나온 무식한 놈이 시인이 돼 있고, 사람을 때렸던 손이 사람을 구조하는 손이 돼 있고, 빵재비가 빵재비들을 교육시키는 교육자가 돼 있네. 참, 인생 뭐라 할까 리얼한 드라마다 싶어.”

황해창 선임기자/hchw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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