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수도권에 있는 A대학의 총장 취임식이 있었다. 새로 취임한 K총장은 장관급 직위를 끝으로 은퇴한 전직 공무원이었다. 공직에 있던 사람이 교수나 임원으로 대학에 재취업하는 경우에 그 학교 구성원들은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것이 상례다. 예산이나 규제 권력을 쥐고 있는 부처들로부터의 ‘낙하산’ 인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공직자 출신이 대학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와 강의에 기여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순수 학문적 인식도 작용한다.
그러나 K총장의 경우는 대학 구성원들로부터 환영받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편모슬하에 경제적 형편이 극히 어려웠던 어린 시절에 그는 상고를 나와 은행을 다녔다. 저녁에는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주경야독으로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그 후 공무원들에게 주어지는 2년간의 해외연수 기회를 활용해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평소 학문에 대한 열망이 지대했던 그이기에 학교발전을 위해 열성을 다할 것이다. ‘국제시장’ 세대보다 20년은 젊은 그지만 이만하면 가히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다.
K총장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고시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이동성 증진에 크게 공헌해온 제도다. 신분에 따라 일정한 응시자격 제한이 있었던 조선조의 과거제도와 달리 고시는 보다 더 보편적인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했다. 다양한 배경의 인사들이 공직에 등용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소극적 대표관료제의 의미 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배경의 인사들이 행정 및 사법 관료로서 공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그만큼 다양한 처지에 있는 시민들의 선호를 정책과 판결에 공정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적극적 대표관료제의 의의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의의를 지닌 고시제도가 지금 한국에서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다. 법학대학원(Law School)의 도입으로 사법고시가 점차 대체되는 과정에 있고, 외무고시 또한 국립외교원 과정에 의해 대체됐다. 행정고시도 2017년까지 절반으로 선발인원을 줄이고 나머지는 민간경력자로 대체한다는 정부안이 나와 있다. 고시에 대한 이와 같은 변화의 시도는 고시제도를 운영하면서 빚어지는 사회적 역기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고시 낭인’으로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인사행정의 차원에서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고시제도의 내용 자체에 있었다. 고시를 통해 과연 공직에 적합한 인물을 제대로 가려해 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교과서 수준의 내용을 외워 쓰는 필기시험 점수가 미래 행정ㆍ사법 관료들의 공공의 윤리와 리더십 자질을 가려내는 잣대로서 과연 적합한가의 문제다.
행정학과 법학 교육은 다양한 이론을 익히는 것에 더해 그 이론들을 현실에 적실하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즉 맥락지성(contextual intelligence)을 또한 함양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행정학과 법학 교육에서 사례 중심의 역동적인 토론식 교육을 중시하는 이유다. 그 동안 필기시험 위주의 고시제도는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전문교육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이었다.
해법은 로스쿨 같은 전문교육과정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미래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적실성 있는 능력을 함양하고, 아울러 공직에 적합한 인재들을 자연스럽게 걸러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문교육 과정을 이수하려면 저소득층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경제적 비용이 따르는 점이다.
이 때문에 사회이동성이 위축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하고도 적극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로스쿨 폐지론과 고시제도 부활론은 명분을 얻고도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