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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비운의 배우 조덕현을 기억하십니까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배우 조덕현(1914-1995).

1932년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상하이에 있는 한국 배우 김염을 찾아감. 그의 도움으로 중국 감독 쑨유의 ‘The Big Road’에 단역 출연. (…) 마침내 비중있는 역할을 제안 받았지만 중국 공산당과의 마찰로 출연 무산. 전쟁 통에 아내와 아이들을 잃고 홀로 서울로. 영화관을 다시 기웃거리지만 한형모 감독 영화 한 편에 단역 출연으로 끝. 영화 제작자에게 사기 당해 재산을 탕진함. (…) 1985년.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기 시작함. 그의 나이 81세이던 해 감기를 앓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됨.

한국영상자료원 아카이브를 뒤져도 나오지 않는 자료다. 비운의 배우 조덕현은 미술가 조덕현(58)이 실제 배우 조덕현(48)으로 재연한 가상의 인물이다. 조덕현의 일생에 드라마틱한 서사를 입힌 건 소설가 김기창이다. 지난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배우 김염(왼쪽)과 조덕현을 그린 한지에 연필로 그린 그림.
헐리웃에픽-키드 갈라드, 145×112㎝, 캔버스 한지에 연필, 2015

미술, 영화, 문학, 음악이 결합된 이색 전시가 일민미술관(관장 김태령)에서 열렸다. 중견작가 조덕현의 개인전 ’꿈‘이다. 주축은 미술이다. 총 16점의 회화와 영상물, 9개의 검은색 박스, 폭 15m의 대형 스크린 설치작품이 나왔다.

전시는 1, 2, 3층이 각각의 세부 주제로 나뉜다. 가상의 배우 조덕현의 이야기는 1층 전시장에 펼쳤다. 전시의 들머리는 1950년대 앤티크 소품들, 조덕현이 살았던 방 등 서사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설치 작품들이다. 메인 스토리는 캔버스에 풀어 놨다. 조덕현 작가가 수집한 옛날 영화 장면을 배우 조덕현이 재연하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어 조 작가가 한지에 연필로 그렸다. 흑백사진처럼 정교하다. 
2층에 전시된 ‘Hommage I, II(2011)’. 서로 마주보도록 설치해 놨다.
3층에 전시된 스크린 설치 작품.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작품 앞에 선 미술가 조덕현(왼쪽)과 배우 조덕현.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의 배우 박노식 얼굴 대신 가상의 배우 조덕현(실제 배우 조덕현이 연기함)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영화 ‘흑화(1968)’의 한 장면에선 배우 김지미 등과 연기하는 조덕현의 모습이 있다. 할리우드 씬도 있다. ‘카사블랑카’에선 잉그리드 버그만 옆에 험프리 보가트 대신 조덕현이 있다. ‘키드 갈라드’에도 그가 있다.

동명이인의 배우 얼굴을 합성해서 그려 넣은 농담같은 작품들의 배경에는 가볍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머니가 5~6년 동안 요양원에서 식물인간처럼 누워 계셨다. 근래에 주변에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 서서히 퇴장하는 그들을 보며 산다는 게 뭔가 생각하게 됐다.” 조덕현 작가의 말이다.

영화 장면들은 가상의 배우 조덕현의 ‘기억 교란’을 비추고 있다. 유리벽 너머 들려오는 폣병걸린 노인의 기침소리는 이 모든 장면들이 실은 조덕현의 과대망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일깨워 준다.

조덕현 작가의 조덕현 이야기에는 “내가 왕년에 말이지” 혹은 “나도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며 삶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한 인간의 회상(혹은 망상)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냉전교육을 받았던 세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직된 프레임이 깨지고 나니 사람들의 미시적인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멀리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애착을 회상이 갖는 역동성으로 풀어냈다”고 말했다.

1층이 배우 조덕현의 꿈에 대한 이야기라면, 2층은 작가 조덕현의 꿈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 작품들과 앞으로 보여줄 작품들을 대형 블랙박스 안에 담았다. 박수근 화백의 딸 박인숙 씨를 모델로 그린 ‘오마주(2011)’ 작품도 나와 있다. 뚜껑이 닫혀 있는 건 아직 개봉하지 않은 향후 작품들을 암시한다.

3층은 스크린 설치 작품이다. 하얀색 옥양목 스크린 너머 이름모를 들풀들이 검은색 실루엣으로 아른거린다. 마치 동양적인 산수화를 펼쳐 놓은 듯 하다. 손톱 크기보다도 작은 사람들의 실루엣도 비친다. 여기에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서정적이다.

전시는 10월 25일까지, 관람료는 일반 5000원, 학생 4000원.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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