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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진영논리’보다 더 파국적인‘계파논리’
‘친박’(親박근혜)은 날았다. ‘친유’(親유승민)와 ‘친이’(親이명박)는 날라갔다. ‘친김’(親김무성)은 목숨을 부지했다. ‘친노’(親노무현) 몇은 솎아졌다. 따로 뭉친 ‘호남계’는 분란이다. 16일까지 대체로 마무리된 여야 각당의 4ㆍ13 총선 공천을 요약하기 위해선 몇 문장 이상이 필요없다. 그렇게 2016년의 한국 정치는 빈곤하다. 공천의 피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 남은 것은 분노와 증오, 조롱과 혐오 뿐이다.

‘계파’를 ‘계파논리’로 쳐낸다는 역설. 자파(自派)에 봉사하겠다는 광신적인 소영웅주의. ‘내가, 우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과대망상적 자기애. 받은 것은 반드시 갚는다는 복수의 열망. “죽이자, 솎아내자”는 일개 의원 차원의 막말이거나 실언이 아니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오늘의 한국 정치를 관통하는 논리, ‘계파논리’의 압축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길지도 않은 시간, 지난 보름여의 공천 과정 중에서 확인된 한국정치의 참담한 현재다.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사상의 고삐가 풀린 이후, 혹자는 좌우로 갈린 ‘진영논리’가 한국 정치의 폐해라 했다. 국가권력과 자본, 계급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 입장이 곧 이념이고, 그에 따라 나뉘어지는 게 보수와 진보일터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의 좌우 대결은 정책과 노선에 앞서 상대 진영에 대한 ‘적개심’에 바탕해 있다는 것이 ‘진영 논리’를 비판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허울뿐일 지라도 정책과 노선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니 ‘진영논리’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정책과 노선의 탈을 벗으니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계파논리’만 남았다.

그 결과 누구는 다선(多選)이라 탈락했고, 누구는 ‘해당인사’라 떨어졌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경우는 ‘정무적 판단’이라는 근거가 내세워졌다. 눈가리고 아옹이다. 바탕에는 오로지 ‘계파논리’ 뿐이다.

‘계파’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계파’가 ‘계파’를 쳐내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계파’가 나쁜 이유는 나뉘었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 나뉘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정책과 노선이 아니라 특정인에 대한 친분과 충성도로 갈라졌다는 데서 비롯된다. 특정 계파라는 이유만으로 국민 여론이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와는 위배되는 공천 심사가 더 이상 진행돼서는 안된다.

이제 실낱같은 희망은 다시 국민의 몫으로 돌아왔다. ‘계파’가 가린 진실을 볼, 혜안이 필요하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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