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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 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흑화한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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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프란시스코 고야, 옷을 입은 마하(일부 확대), 1800~1803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질병, 증오, 분노, 배신, 시기, 질투, 미움, 원망.

1820년대 초, 스페인 마드리드 교외의 전원주택. 프란시스코 고야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단어들을 다시 한번 일기장에 썼다. 미움, 배척, 교만, 탐욕, 추악. 고야는 계속 펜을 움직였다. 그리고 나, 너, 우리, 인간…. 고야는 펜을 탁 내려놨다. 흘러내린 흰머리를 매만졌다.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 관절이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밖에서 폭우가 쏟아졌다. 번개가 거듭 내리쳤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집에 홀로 있는 고야는 그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
프란시스코 고야, 성 이시드로의 축제
프란시스코 고야, Fight with Cudgels

고야는 벽시계를 쓱 보곤 일기장을 옆으로 툭 쳤다. 저녁 시간이었다. 그는 부엌 식당으로 몸을 천천히 옮겼다. 거미줄이 몸에 엉겨 붙든 말든 그대로 뒀다. 고야는 식탁에 놓인 마른 생선 따위를 으적으적 씹었다. 그러면서 식당 벽에 채워진 자기 그림들을 봤다. 최고의 신(神) 자리를 자식에게 뺏길까 봐 아들이 태어나는 대로 뜯어 먹는 사투르누스를 보며 낄낄댔다. 성(Santo) 이시드로의 축제 날 기괴하게 절규하는 사람들을 감상하며 포도주를 들이켰다. 서로를 향해 죽도록 곤봉을 휘두르는 두 사내를 음미하며 입을 슥 닦았다. 만족스러웠다. 위대하신 국왕조차 볼 수 없는, 오직 그만이 즐길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좀체 질리질 않았다.

프란시스코 고야, Witches' Sabbath

자리에서 일어난 고야는 또 붓을 찾았다.

그림자보다 집요하게 눌어붙는 역병, 공포를 몰고 오는 마법사와 마녀, 사람들을 망신 주는 광기의 신, 히히덕거리는 원혼, 악귀, 악마….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났다. 그리고 싶은 건 많았다. 사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고야는 느직느직 움직였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에서 창문을 봤다. 가뭄 맞은 땅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이 낡은 유리에 새삼스레 자신을 비춰봤다.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심술만이 가득했다. 검버섯은 곰팡이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누런 이는 추레했다. 고야는 두 손을 들어 볼을 어루만졌다. 세월이 패어 있었다. 늙음은 느껴지는 게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악마의 창작열이 이따위 몸뚱이에 갇혔다는 생각에 갑자기 서글퍼졌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답도 없는 늙은이는 아니었다. 꿈 많고 야망도 큰 시절이 있었다. 무서울 것 없는 권력으로 쏘다니던 순간도 있었다. 대담하게 국왕 일가와 귀족 세계까지 희롱하던 시절도 있었다. 고야는 두 손으로 눈을 푹 덮었다.

탈락? 어쩌라고?…꺾이지 않는 야심
프란시스코 고야, 마누엘 오소리오 만리케 데 수니가(빨간 소년)

'불합격.'

1766년 마드리드. 막 20대에 들어선 고야는 통보서를 마구 뭉쳐 구겼다. 왕립 미술학회 입회 심사에서 또 떨어졌다. 심사 위원 전원이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만장일치 꼴찌였다. 3년 전에 이어 두 번째 탈락이었다. "머저리 같은 것들. 내가 아니면 누구를 뽑는 건지. 분명 '빽'이 있을 것이야." 혈기 왕성한 고야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분을 참지 못한 채 종이를 마구 짓밟았다.

고야는 자기 실력을 한순간도 의심치 않았다.

프란시스코 고야

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농가에서 태어난 고야는 어릴 적부터 재능이 출중했다. 특히 구도 잡기, 명암 조절은 이미 프로의 경지였다. 고야는 신의 선물을 한껏 누리기로 했다.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키웠다.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렸다. 무엇보다 성격이 문제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자신에게 딱 맞는 재능을 찾은 사람이 그렇듯, 이 어린 천재는 당돌하고 맹랑했다. 고야는 14살 무렵 종교 화가 호세 루산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더 큰 세상이 궁금했던 그는 곧 마드리드로 몸을 옮겼다. 당대의 유명한 궁정화가였던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로 들어갔다. 고야는 허구한 날 스승, 또래 친구들과 충돌했다. 그는 끝내 졸업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와중에 아카데미 2연속 '광속 탈락', 게다가 심사위원 전원이 "얘는 싫어!"라고 말했다니…. 고야의 편은 많지 않았다. 많을 리 없었다. 고야가 뒷배를 의심한 일도 억측은 아니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The Forge

젊은 야심가는 낙담하지 않았다.

고야는 여전히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내였다. 분노를 동력삼아 더 크게 움직였다. 1771년.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국을 뒤로 하고 이탈리아로 갔다. 고야는 이탈리아 내 유명한 파르마 아카데미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외풍에 당하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심사위원 면면을 다 익혔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훗날 더 큰 성공을 위해 이들의 선호 화풍도 다 뒷조사했다. 합격이었다. 실력에 편법까지 더해지니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이 당연한 결과를 여태껏….' 고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야는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문화예술 메카와 같은 이탈리아에서 인정받았으니 어찌 보면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자신감에 찬 그는 야망의 화신이 돼 있었다. 고야는 바쁘게 움직였다. 1773년, 고야는 동갑내기 소꿉친구인 호세파 바예우와 대뜸 결혼했다. 이미 차세대 화가 반열에 오른 처남 프란시스코 바예우와의 관계 쌓기에 공을 들였다. 치고받던 옛 동료들과도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얼마 안 돼 고야는 처남의 추천으로 마드리드 궁정에 입성했다. "지긋지긋한 재야 생활은 안녕이군요." 처남 바예우가 웃었다. 고야는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건 모두 계산된 일이었다는 양.

잘나가는 화가에서 사상가로…‘계몽’ 꿈꾸다
프란시스코 고야, The Parasol

고야는 승승장구했다.

고야는 궁정의 벽걸이 양탄자(태피스트리)를 들고 아기자기한 로코코 풍 밑그림을 그렸다.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전속 부처는 고야의 손길을 거친 벽걸이 양탄자를 보곤 바로 20여점을 추가 주문했다.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를 대작업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왕실이 그를 눈여겨본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주님의 이름으로 경배

고야 앞으로 사라고사의 필라르 대성당 내 벽화 작업 의뢰도 내려왔다. 이 일만 성공하면 눈도장은 확실했다. 그러나 고야는 권력에 홀려 물불 안 가린 채 일을 추진했고, 결국 처남 바예우와 크게 충돌했다. 고야는 이번에도 자기 실력을 의심치 않았다. 고야의 눈으로 볼 땐 이리저리 토를 다는 바예우가 머저리였다. 말이 안 통한다고 본 고야는 그냥 다 때려치웠다.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당연히 벽걸이 양탄자 일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의 초상

고야는 이대로 '반짝스타' 인생이 아예 끝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 시절에는 그런 화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고야는 다시 기회를 잡았다. 빳빳한 종이를 받아 든 고야는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봐도 왕세자 부부의 주문 의뢰서가 맞았다. "왕세자께서 자네의 양탄자 데생을 잊지 않고 있더구먼." 전령의 말에 큰절을 할 뻔했다. 고야는 영혼을 갈아 그림을 그렸다. 성공적이었다. 이후 고야는 카를로스 3세의 최측근이었던 플로리다블랑카의 초상화도 만들었다. 1785년쯤부터는 고야 앞에 잘나가는 귀족 모두가 줄을 섰다. 초상화 주문이 이어졌다. 대담하고 빠른 붓질이 그의 전매특허였다. 특히 옷감의 주름과 광택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1789년, 미래 권력이었던 왕세자가 카를로스 4세로 즉위했다. 40대 초반의 고야는 궁정 화가로 호기롭게 군림했다. 주 업무는 초상화 작업이었다. 정말 열심히 그렸다. 궁정 화가가 된 후 남긴 초상화만 350여점에 이를 정도였다. 10년 뒤 고야는 꿈에 그리던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장을 받았다. 연봉은 엄청났다. 전용 사륜마차까지 받았다. 고야는 드디어 예술계 최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잘나가는 화가로 우뚝 섰다.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년, 무서울 것 없던 고야가 세리머니 하듯 그린 그림이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다. 이제야 긴장을 푼 고야는 오랜 세월 억누른 당돌함을 이 작품에서 폭발시켰다. 그림 한가운데는 궁정의 실세였던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서 있다. 그 옆에 있는 카를로스 4세는 별로 멋있게 그려지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코,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를 보면 국왕의 위엄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델이 된 13명 모두에게 왕족다운 위엄과 기상을 찾을 수 없다. 고야는 그림 왼쪽에서 이들의 모습을 한심한 듯 보고 있다. 불경죄로 잡혀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다행인지, 카를로스 4세 일가는 고야의 맹랑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Witches_Sabbath

그런데 의문이 든다. 아무리 최고 권력을 쥐었다고 해도, 야망이 흐르다못해 넘친 남자가 '뒤끝'을 이렇게까지 남길 필요는 있었을까.

사실 그 시절 고야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내건 이상에 빠져있었다. 특히 계몽주의 사상에 푹 빠졌다. 관련 철학책을 싹 다 모으려고 할 정도였다. 야망가는 사상가가 됐다. 지금이야 잘나가는 화가로 권력을 따냈지만, 고야는 자신이 여태 가진 자의 '빽'에 밀려 온갖 수모를 겪었다고 믿었다. 그런 그에게 현 권력과 풍습은 낡았고, 그렇기에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계몽주의는 그 자체로 혁명적 발상이었다. 이를 접한 후부터 왕과 귀족이 당연한 듯 누리는 사치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카를로스 4세 일가도 예뻐 보일 리 없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개인적 이유도 있었다. 고야에게 일이 많아도 너무 많이 쏟아졌다. 귀족들의 작품 소장 욕심은 끝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남은 시간은 하고 싶은 일을 하게끔 조용히 놔뒀으면 좋겠다." 이쯤 고야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과로에 시달리던 고야는 1792년에 갑자기 고열을 앓았다. 머리가 깨질 듯 울렸다. 어지럼증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는 청력을 잃었다. 옆에서 벼락이 내려쳐도 들리지 않았다. 고야는 이번 일로 거의 죽을 뻔했다. 5년을 고생하고서야 겨우 고열을 떨쳐냈다. 주문 닦달만 할 뿐, 그의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권력자는 드물었다. 고야의 그림은 이 일을 겪은 이후부터 더 도발적으로 바뀌었다.

참혹한 실체…인간에 회의를 품다
프란시스코 고야, The Colossus

1808년. 기어코 나폴레옹이 프랑스군을 몰고 와 스페인을 장악했다.

자기 형 조제프를 제멋대로 스페인 왕 호세 1세에 임명했다. 스페인 독립전쟁은 이 때문에 터졌다. 민중 봉기가 이어졌다. 그해 5월2일, 프랑스 기병대와 용병대가 마드리드로 들어왔다. 민중을 총칼로 제압했다. 눈 뜨고는 보기 힘든 학살이 벌어졌다. 500여명이 죽었다. 이 가운데 113명은 공개처형을 당했다.

예순이 넘은 고야는 살육 현장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는 이 장면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환상이 깨진 순간이기 때문이다. 당시 고야는 프랑스 편에 더 가깝게 섰다. 덕분에 권력도 건재했다. 나폴레옹의 형 호세 1세의 초상화 작업도 도맡았다. 고야는 프랑스발(發) 계몽주의를 믿었다. 이 빛이 스페인의 낡은 기득권을 깨부수길 바랐다.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어주기를 염원했다. 실상은 아니었다. 계몽주의는 정치 구호로 쓰일 뿐이었다. 겉은 번지르르했지만 알맹이는 별것 없었다. 외려 계몽이랍시고 반대파를 패고 괴롭혔다. 뜻을 관철하기 위해선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였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천국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2일

1813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맞물려 나폴레옹의 형인 호세 1세도 왕위에서 물러났다.

호세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페르난도 7세(카를로스 4세의 장남)가 돌아왔다. 고야는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대작 작업에 열을 올렸다. 기병대와 외국인 용병들이 살벌하게 칼을 휘두르고 있다. 바닥에는 시민들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져 있다. 현장에는 비명과 신음만이 가득할 듯하다. 이 그림은 훗날 이렇게 불린다. '1808년 5월2일'.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일부 확대)

흰 셔츠의 시민이 무력하게 양팔을 들고 있다. 손바닥에 못 자국이 있다. 십자가형을 받는 예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많은 이가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공포, 좌절, 분노, 체념 등 갖은 감정들이 잔뜩 묻어있다. 왼쪽 한편에는 희생된 이들이 무력하게 누워있다. 프랑스군은 그런 이들에게 총구를 대고 있다. 이 작품은 가까운 미래에 이렇게 불린다.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던 그 다음 날, '1808년 5월3일'.

프란시스코 고야, The Madhouse

고야가 여태 호세 1세에게 충성한 데 대한 면죄부 차원에서 그린 것인지, 계몽주의에 실망한 그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태도로 있다가 작정하고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고야는 그간의 행위를 용서받았다. 고야는 페르난도 7세에게 다시 희망을 걸었다. 그는 새로운 국왕에게 1808년의 민중봉기를 기념해야 한다고 앞장서 청원도 제출했다. 하지만 또 좌절을 맛봤다. 민중이 복귀를 간절히 기대해 '갈망 받는 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페르난도 7세는 알고 보니 최악의 암군(暗君)이었다. 개혁성은 찾을 수 없었다. 나라는 과거로 회귀했다. 종교재판소까지 다시 등장했다. 고야는 인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인간은 진보를 향해 전진하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란 애초 기쁨보다 증오, 격려보다 질투를 더 즐기는 '악의 본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야의 한숨은 점점 더 깊어졌다.

서양 최초 ‘인간 누드화’…화형 위기 기사회생

고야는 이제 구멍 뚫린 풍선 같았다.

젊은 시절 한껏 부풀어 오른 그 풍선은 곳곳에 구멍이 뚫려 맥없이 쪼그라들었다. 기진맥진한 고야는 1815년, 또다시 수모를 겪었다. 잘못되면 화형을 당할 수도 있는 위기였다. "종교 재판에 출두하시오. 음란한 그림을 왜 그렸는지 해명하시오." 무슨 그림? 갑자기 왜 그래? 고야는 뜬금없는 통보를 받고 기억을 더듬었다. 혹시 15년전에 그린 '옷을 벗은 마하' 때문에? 그걸 이제야? 어이가 없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옷을 벗은 마하
프란시스코 고야, 옷을 입은 마하

사연은 이랬다.

초상화 주문이 쇄도하던 고야의 황금 시절, 그는 당시 재상이던 마누엘 고도이와 마주했다. 고도이는 은밀한 의뢰를 했다. 옷을 벗은 여인을 그려달라고 했다. 당시 스페인은 누드화를 금지했다. 선대의 누드화도 다 찢어 없앨 정도였다. 고야도 사회상을 잘 알았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거절할 수 없었다. 고야는 야망 덩어리였다. 계몽의 힘을 믿은 사상가였다. 세상을 보다 밝게 만들기 위해선 일단 권력이 필요했다. 상대는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실력가였다. 고야는 누워있는 여성의 누드화를 그려줬다. 고도이의 애인 페피타 츠도우를 모델로 삼았다. 그 시절 고야와 연인 관계였던 알바 공작 부인이라는 말도 있다. 이 여성에게는 '마하'라는 이름을 붙었다. 스페인어로 풍만하고 요염한 여자라는 뜻이었다.

프란시스코 고야, The Black Duchess(알바 공작부인)

이렇게 서양 미술사상 최초로 신 말고 실존하는 여성의 나체를 그린 그림이 탄생했다. 고도이는 작품을 받아 들고 입을 헤벌쭉 벌렸다. 고도이는 자기 방에서 '옷을 벗은 마하'를 걸고, 그 앞에 도르래로 고야의 또 다른 작품 '옷을 입은 마하'를 둬 이를 움직이면서 두 그림을 즐겼다고 한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 것 같던 고도이는 1808년 실각했다. 고도이가 누드화를 모아놓은 방도 발각됐다. 하필 고야의 그 그림이 떡하니 있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종교재판소는 작정하고 고야를 소환했다.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 누구요?" 고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끝내 밝히지 않았다. 고야는 겨우 살았다. 그의 재능을 아낀 지인 몇 명이 도운 덕이었다. 다만 궁정화가 직은 상실됐다. 야망을 잃은 고야는 권력까지 잃게 됐다.

흑화한 야심가…‘검은 그림’ 남긴 채
프란시스코 고야, Self-portrait with Dr Arrieta.(1819년 말에 중하고 위험한 병에서, 뛰어난 의술과 정성으로 73세의 나를 구해준 벗 아리에타에게 감사하며 1820년 고야는 이 그림을 그림이라고 쓰여있다.)

주름투성이 고야가 두 손을 내리고 다시 창문을 쳐다봤다.

그간 참 애썼다…. 고야는 눈을 비볐다. 그는 1819년, 73세의 나이로 이 집을 샀다. 이곳에 들어간 뒤로는 거의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만나는 건 이제 악과 질병, 부정적 감정으로 똘똘 뭉친 환영뿐이었다. 고야는 세상에 미련을 버렸다. 단절을 택했다. 이쯤 눈은 거의 멀었다. 청력 잃은 귀에서는 윙윙대는 소리만 들렸다. 고야는 집 안 벽면을 검게 칠했다. 4년간 벽화 14점을 그렸다. 조수의 도움도 없이 인생 마지막 역작을 빚어냈다. 고야는 삶과 권력에 대한 환멸, 인간의 광기와 폭력성을 느낀 그대로 표현했다. 선은 더 거칠어졌다. 벽화는 어둡고 기괴했다. 흉측하고 어딘가 뒤틀렸다. 상관없었다. 애초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이 그림은 훗날 '검은 그림'으로 불리게 된다.

프란시스코 고야, Two Old Men
프란시스코 고야, The Dog

고야는 1824년 뒤늦게 친프랑스파로 낙인찍혔다.

이 눅눅한 집에서 쓸쓸히 사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고야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했다. 파리와 보르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고야는 끝내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고야는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오래 살았다. 다만 이 때문에 아내도, 가장 친한 친구도 먼저 떠나보냈다. 그는 급격히 쇠약해졌다. 흑화(黑化)한 야심가는 프랑스 보르도에서 1828년 82세 나이로 사망했다.

〈참고 자료〉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민음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2)“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3)‘이 그림’ 때문에 화형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4)‘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5)“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6)“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7)“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8)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9)“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1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1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1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1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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