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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직 때문에 기술 유출한 삼성 연구원…가족에 보낸 ‘문자’ 유죄증거 됐다[박지영의 법치락뒤치락]
박지영의 법치락뒤치락

검사의 공격, 변호인의 항변. 원고의 주장, 피고의 반격. 엎치락뒤치락 생동감 넘치는 법정의 풍경을 전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삼성전자 미주총괄 법인. [삼성전자 뉴스룸]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A씨는 잘나가는 ‘삼성맨’이었습니다. 1998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2년 동안 개발 부서에서 D램을 연구·개발하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개발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D램과 관련한 CS(고객응대) 등 업무를 맡았고, 2019년부터는 삼성전자 미국 법인에서 일했습니다. A씨는 2022년 6월 본사 복귀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삼성전자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기술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수사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검찰은 지난해 8월 A씨를 기소했고 약 10개월에 걸쳐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산업기술의유출방지및보호에관한법률(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및영업비밀보호에관한법률(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업무상 배임. 평범한 샐러리맨은 상상하기 어려운 혐의입니다.

A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미국 지점에서 쓰는 자료를 개인 메일로 보낸 것은 맞지만, 본사 복귀를 앞둔 ‘준비’였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검찰은 지목한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애플, 구글, 메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경쟁사 이직’이었습니다.

“복직하면 쓰려고” 주장에 검찰은 ‘시큰둥’

검찰에 따르면 A씨는 2022년 3월부터 6월까지 국가핵심기술을 포함해 130여건의 삼성전자 기술 자료를 유출했습니다. 미국 법인에서 사용하던 자료를 자신의 개인 이메일로 보낸 것이죠. AI 시대 미래먹거리로 꼽히는 HBM 관련 기술도 포함돼있었습니다.

지난 4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부장 오세용) 심리로 5번째 공판이 열렸습니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중년 남성이 변호인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A씨의 변호인이 PPT 화면을 띄웠습니다. 삼성전자 본사와 미국 법인은 ‘아주 다르다’는 전제부터 설명합니다. 본사는 기술 개발부터 마케팅까지 전분야를 아우르지만, 미국 법인은 판매와 고객사 영업만 맡고 있어 자료의 가치가 낮다는 겁니다. A씨는 미국 지점의 자료에 민감한 내용이 포함됐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고, 이를 개인 메일로 보내는 것도 ‘기술 유출’이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주장입니다.

무엇보다 ‘제3자’에게 자료를 유출한 적이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A씨의 죄가 성립하려면 ▶해외에서 사용하거나 사용 되게 할 목적 ▶부정한 이익을 얻거나 삼성전자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이 있었다는 점이 인정돼야 합니다. A씨나 경쟁사가 이익을 얻지 않았고, 삼성전자에게 손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라는 취지입니다.

삼성 연구원 기술유출 공판(24.04.19)
변호인 A씨가 이직을 시도한 업체는 삼성전자의 고객사나 협력사입니다. 이해관계가 대립하거나 상충하는 회사가 아닙니다. 애플, 오큘러스, 구글, 테슬라 모두 삼성전자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사입니다. 유출 자료가 제공됐다고 해도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인지, 활용해서 삼성전자에 손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중략) 자료가 제3자에게 유출·누설된 사실도 전혀 없습니다. 이직 과정에서 활용한 사실도 없습니다. 피고인이 면접을 본 곳은 애플 등 2곳인데 면접 과정에서 자료를 활용한 사실이 없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도 불기소 처분했습니다.

그렇다면 A씨는 왜 자료를 개인 이메일로 보낸 것일까요? 해명을 들어봅시다.

삼성 연구원 기술유출 공판(24.04.19)
변호인 이메일로 자료를 보낸 것은 본사 복귀 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CS팀에서는 일관된 고객 대응이 중요하고, 기존 고객 이력 관리 자료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중략) 6월에 발송한 자료가 97개인데, 6월 말 이직 시도가 마무리된 후 본사 복귀 직전에 많은 자료를 보낸겁니다. 목적이 이직 활용이 아니라 본사 복귀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A씨측의 PPT 발표가 끝난 후, 검찰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이미 다 나왔던 주장”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검찰은 “5~6월에 집중해서 자료를 보냈다고 하는데 그 시기가 이직 시도가 가장 집중된 시기다. 최종 이직 시도가 좌절되고 나서는 자료를 보내지 않는데, 만약 회사에 쓰려고 했다면 그 이후에도 자료를 보냈겠죠”라고 짧게 덧붙이는 정도였습니다.

가족에게 보낸 ‘문자’에 담긴 진심, 유죄 증거 됐다

그로부터 2달이 지난 6월 21일, A씨의 1심 선고가 나왔습니다. 결과는 유죄. 검찰이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사건 자료를 ‘미국 내 반도체 관련 회사에서 사용하게 하거나 회사가 사용하게 할 목적’ 내지 ‘미국 내 반도체 관련 회사 구직활동에 이용하거나 이직 후 업무에 이용하는 등의 이익을 얻을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재판을 듣던 기자도 헷갈렸던 그의 목적. 재판부는 어떻게 확인했을까요? 답은 A씨가 가족에게 보낸 메시지에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싶어하는 가족을 위해, 미국에서 계속 일할 직장이 필요했던 것이죠.

삼성 연구원 기술유출 1심 판결문 中
피고인 및 변호인은 본사 복귀를 앞두고 복귀 후 업무에서 활용할 목적으로 유출했다고 주장하나 (중략) 피고인은 2021년 6월경 피고인의 부인과 아들은 2021년 7월경 각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던 점, 직후 아들에게 ‘가족을 위해서 이 길을 선택하지만 (중략)’ 라는 말이 담긴 녹음을 보낸 점, 2022년 1월경 처남에게 ‘나는 6월 말에 들어가서 8월에 나올 생각이야’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고 (중략) 피고인은 대외적으로 미국 현지에서의 이직 결심을 분명히 표현했다. 2022년 6월 말 본사로 잠깐 복귀하더라도 8월경 미국으로 돌아가 관련 회사에 취직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씨가 이직에 성공했다면 유출한 자료들이 업무에 사용될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A씨가 자료를 유출해 ‘부정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유출한 자료를 활용해 이력서를 만든 정황도 포착했습니다.

삼성 연구원 기술유출 1심 판결문 中
변호인은 경쟁회사에 지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이력서를 제출한 곳 중에는 D램 개발에 있어 경쟁회사임이 분명한 미국 내 하이닉스도 있었고, 마이크론에 지원할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중략) 경쟁회사에 지원하거나 지원할 예정이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력서를 제출한 회사 중 7개 회사의 지원 부서는 삼성전자 등으로부터 납품받은 제품의 품질을 검사하고 고객대응을 하는 곳이므로, 피고인이 품질주재원으로서 고객대응을 하며 보관한 사건 자료가 활용될 가능성이 높고 직무 관련성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유출 범죄는 대표적인 화이트 컬러 범죄입니다. 피고인들은 관련 학과를 나와 석사‧박사 학위를 따고, 업계에 진득하게 몸을 담은 사람입니다. 본인이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미미합니다. 제품 개발이나 관리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회사의 기술을 ‘내 기술’로 착각하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회사의 지원 아래에서 만들어진 모든 기술은 회사의 자산입니다. ‘참고하려고’ 받았다는게 진심이라 해도, ‘경쟁사’에 넘기지 않았다고 해도, 엄연히 유출입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술이 한 기업을 넘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위험한 행동이겠죠.

유죄 인정에도 집행유예
[게티이미지]

그동안 기술 유출 범죄는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유죄 판결을 받아도 80% 가량이 집행유예로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피고인들이 대부분 초범이고 형사 처벌을 받은 적도 없다는 점, 유출을 했어도 피해 기업에 실제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고려됐기 때문입니다.

A씨 또한 재판부로부터 상당한 선처를 받았습니다. 1심 재판부는 혐의를 모두 유죄로 보면서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0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사건 자료들이 개인 이메일에 보관돼있다가 회수되거나 삭제됐고 이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제공하기로 ‘약속’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참작한 것이지요.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초범’이라는 점도 고려됐습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지난 3월 양형 기준을 강화했지만 2024년 7월 1일 이후 기소된 사건에 대해서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강화된 양형기준은 ▶집행유예 참작사유에서 ‘형사 처벌 전력 없음’ 제외 ▶국가핵심기술 유출 양형 범위 기본 3~7년, 가중 5~12년 권고 ▶산업기술 유출 양형 범위 기본 2~6년, 가중 4~10년 권고 등을 내용으로 합니다. 검찰의 이를 고려해 징역 7년과 벌금 2000만원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은 지난 25일, A씨측은 지난 27일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검찰은 지나치게 형이 낮다는 점을, A씨측은 1심과 동일하게 무죄를 주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2심 재판부는 검찰과 A씨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park.jiye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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