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이야기가 과거에는 화려한 외양과 백마 탄 왕자가 있는 집이라는 점이 강조됐다면 요즘 재벌 드라마는 후계 문제 등을 둘러싼 부자 간, 형제 간 암투와 복수 등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지략과 능력 싸움이 볼만하졌고 이를 위해 변호사, 멘토 등 새로운 킹메이커들도 가세해 극적 리얼리티가 풍부해졌다.
드라마 속에서 재벌가의 장남은 절대적인 권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점이 눈에 띈다.
SBS 월화극 ‘마이더스’에서는 처음부터 장남 유기준(최정우)은 인진그룹 후계자 경쟁에서 빠져있다. 차남 유성준(윤제문)이 차기 회장으로 공공연하게 지목된 상태에서 삼녀 유인혜(김희애)가 성준에게 도전을 해온다. 더구나 성준과 인혜의 경쟁은 그동안 보여줬던 남남 대결 구도를 떠나 남녀 대결 양상을 띠고 있다.
‘로열패밀리’도 마찬가지다.
공순호 회장의 큰아들 조동진(안내상) 역시 일찌감치 동생 조동호 박사에게 유력자 자리를 내줬고, 조동호 사후에는 모든 자제들이 후계자 경합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받는다. 현재 공순호 회장에게 가장 큰 점수를 딴 사람은 차기 대통령 후보와 공조를 성사시킨 막내딸 조현진(차예련)이다.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둘째 며느리 김인숙(염정아)에게 JK클럽 사장 자리를 안긴 상태다.
27일 종영한 ‘욕망의 불꽃’에서도 장남인 영대(김병기)는 ‘찌질한’ 존재다. 아버지 태진(이순재)이 장남에게 총수 자리를 줬다가 다시 뺏어버렸다. 그리고는 결국 3남인 영민(조민기)에게 총수 자리를 승계시킨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후계자 경쟁을 벌이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들을 지원하는 킹메이커 혹은 ‘멘토’의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 역할을 이전에는 주로 그룹 내 임원들이 도맡았으나 집안의 고문 변호사들이 새로운 주력층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들은 뛰어난 능력과 법적 지식으로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후계자 후보들을 보좌한다.
‘마이더스’의 경우, 유인혜 집안 고문 변호사로 들어온 김도현(장혁)을 일찌감치 택해 법망을 피해 역작전까지 감행하며 유성준을 인진그룹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성준은 오랜 기간 인진그룹을 위해 헌신해온 최국환 변호사(천호진)를 멘토로 택해 인혜와 도현에게 반격을 가하고 있다.
‘로열패밀리’는 좀 더 로맨틱한 킹메이커를 선보이고 있다. 죽은 조동호의 처이자 자신의 후원자인 김인숙(염정아)을 JK가의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문 변호사를 자청한 한지훈(지성)이 그 주인공이다. 한지훈은 우선 인숙을 금치산자 판정에서 벗어나게 하고 공 회장이 아끼는 JK클럽의 사장 자리에 김인숙을 올려놓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하는 헌신적인 ‘멘토’를 자처하고 있으며 기사도 정신까지 발휘하고 있다.
지훈 역을 맡은 지성은 상처를 지녔지만 검정색 양복이 썩 잘 어울리는 엘리트 검사역을 맡아 ‘태양을 삼켜라’ 와 ‘김수로’에서의 부진을 씻고 있다.
재벌 2세, 집사, 변호사 등 다양한 직업을 지닌 캐릭터들이 재벌드라마에 쏟아지고 있는 것도 또 한가지 변화다. 스위스 집사전문학교에서 강사로 초빙할 만큼 직업정신이 뛰어난 엄 집사(전노민)는 죽은 조회장의 비서였고, 현재는 정가원의 내밀한 일을 도맡아하는 수석집사로서 JK와 전면전에 나선 인숙을 뒤에서 보필하고 있다. 엄 집사는 야누스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JK고문 변호사 김태혁(독고영재)은 공 회장이 유일하게 속을 털어놓는 대상으로 단순히 법률적 자문을 넘어 그녀의 미세한 감정적 변화까지 캐치한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corp.com